남해안 어느 곳에서 살아있을 광양김향기

예나 지금이나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종종 배움의 길에 있는 사람들은 좌절도 하고 쉽게 포기도 했던 게지요.

물론 그것이 삶의 끈을 더욱 튼튼하게 하기 위한 일이라면 종이 접듯 간단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학교 교육을 다 마치고도 교육의 현장을 다녀오고 있습니다. 배움은 끝이 없다는 말이 생긴 이유일 테지요.
선진지 견학이나 양성교육 혹은 강좌 등이 성행하는 이유도 그 배움이라는 일이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하거나 무언가 부족한 여백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는지요.

게 중에도 식구들을 먹여 살릴 호구지 책을 살필 무언가를 위한 배움이라면 그일이 결단코 만만치 않을 것임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요즘도 곤궁한 삶은 어느 곳 어느나라 에도 촘촘한 그물망처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안타까움이 왜 없겠습니까마는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북녘 땅보다 한참 떨어진 산업구조를 물려 받은 까닭에 남녘 땅 곳곳은 신산스러운 나날을 살아야 했던 목숨들이 참 많기도 했지요.

온 삶을 던져 무엇인가를 배워야 살아 지는 시대였습니다.

부모로부터 농사짓는 일을 가업으로 물려받은 이는 부모의 땅이 아니면 남의 땅을 빌려서라도 농사를 지었고 바다 곁에 둥지를 튼 사람들은 그 또한 부모로부터 바다의 일을 배워 바다로부터 살아갈 수있는 일을 이어가야 했지요. 산이나 그 어디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진 게 몸밖에 없는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쫓겨나듯 도심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구두를 닦던 시다를 시작으로 미싱을 돌리던 어느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던 무엇이나 배워 입을 채워야 했으니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배운다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손에 익힌 기술로 식구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으니 그 어떤 일이 라고 어디 천한 일이라 터부시할 수 있었겠는지요.

오늘의 사진은 그 시절의 사진입니다.

1953년의 일이니 아마도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거나 휴전협상이 한창 진행 중일 수도 있겠습니다.

온 산하에 전쟁의 상흔이 여전한 상황 이었지만 그에 비하면 바다는 여여해서 여전히 제 품었던 산물을 토해놓으니 바다를 바라보며 살던 사람들은 형편이 나았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사진 속에 담긴 얼굴이나 입성이 그리 곤궁해 보이지는 않네요.

이 사진은 제3회 금남수산 기술자 양성 강습회 교육생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망덕 해태조합에서 교육받은 김양식 기술을 익히기 위한 과정에 참여한 바다를 터전으로 먹고 살던 이들입니다.

김여익 공이 김양식에 성공하면서 태인 도를 중심으로 성행했던 광양김은 임금에게 받친 진상품이었고 이 당시 전국 최고의 맛을 자랑했지요.

또 바람을 타고 흘러온 소식을 통해 김양식만으로도 먹고 살만 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터이니 적당한 갯벌을 갖춘 바다가 사람들은 광양을 찾아 김양식법을 배웠습니다.

이른 바 광양의 바다와 광양사람들은 그들에게 선진지이자 스승이었던 게지요.

여기서 익힌 김 양식법을 이들은 제 고장 에서 또 뿌리내리기 위해 갖은 연구를 했을 겁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남해 어느 해안가든 김을 생산하고 있으니 지금은 사라져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광양김은 그렇게 다른 듯 같은 모습으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태조합이 융성했을 만큼 유명했던 광양김,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와 배워간 광양김의 풍성한 맛이 어느 때보다 그리운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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