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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되지 않은 친일, 역사와 민중의 봉기 자극했다사진을 통해 풀어보는 여순항쟁2
최인철 기자  |  hwakae72@gyci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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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07  19: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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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친일, 친일
끝나지 않은 그들 반민족의 역사

여순항쟁 초기, 제주민중의 학살을 거부한 14연대 봉기군과 지하에 잠적했다 모습을 드러낸 인민위원회의 주된 표적은 친일경찰과 부역자들이었습니다. 경찰이나 친일유족 중 당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왜 없겠습니까 마는 항쟁세력은 일제에 부역하고 민중들을 억압한 이 친일경찰들이 해방 이후에도 또 다시 거리를 활보하며 떵떵거리는 꼴을 봐야 하는 민중들의 분노는 들불과도 같은 것이었음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있어 미군정의 책임을 외면할 길이 없습니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 12일 남한에 주둔한 뒤 남한을 통치하기 시작한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중추원의원들을 파직하고 당일부로 미군장교를 각도의 장관에 임명, 행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9월 14일에서야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해임했지요.

치안의 공백을 메운다는 명목이었지만 그때 미군의 정체는 또 다른 침략자의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민중의 입장이 아니라 조선 통치를 위한 자신들의 입장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다 뒤늦게 일본인 관리들을 해임한 것이지요.

▲ 노덕술

무엇보다 가장 어이없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정작 일본 치하에 동조한 조선인 출신 조선총독부 고관들, 바로 친일반민족부역자들을 행정고문이라는 이름으로 등용한 것이지요. 조선의 사정을 파악하게 하는 한편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이용, 미군정 체제를 안정적으로 정립한다는 명목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미군정의 친일관료와 순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친일경찰의 재배치는 당시 민심과 정면 배치되는 행위였음은 달리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1946년 11월 2만 5천여 명의 경찰 가운데 5천여 명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는데요, 그 수가 많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이들은 경찰 고위직을 장악한 데 있습니다. 숫자로 보자면 1946년 5월 경찰 간부 1153명 가운데 945명이 일제 경찰 출신으로 전체의 82퍼센트를 차지했으니 해방된 조선의 경찰이 또다시 친일경찰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던 겁니다. 덧붙이자면 전국 140여 명의 경찰서장 가운데 110여 명이 일제 경찰출신이었고 조선경비대의 주요 간부 26명 가운데 23명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으니 조선민중이 분노하지 않을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들 친일반민족경찰들은 미군정 하에서도 각종 비리와 착취, 민중탄압을 일삼았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놈들이 또다시 민중을 탄압하는 형국이니 해방 당시 남한의 민중들의 내재된 분노가 어떠했을지 짐작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의 실패와 함께 민중들에게 피해 체감온도가 높았던 친일경찰에 대한 재임용은 민중의 반감과 불만은 필연적으로 조선민중의 항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미군정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 등 당시 자체적으로 건국을 준비하던 세력과 협력 내지 협조를 외면한 채 치안유지를 위해 일제치하에서 악명이 높았던 반민족 친일경찰을 다시 치안전면에 내세웠고 이들 친일경찰이 다시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민중의 삶을 핍박하는 역사적 악순환을 불러왔던 게지요.

허종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는 “해방 직후 전국 곳곳에서 친일파를 응징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본인 관리보다 조선인 관리를 폭행한 사례가 훨씬 많았고 이 때문에 미군이 남한에 진주할 때까지 경기도 경찰의 출근율이 일본인이 90퍼센트인데 비해 조선인은 20퍼센트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친일파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밝혔습니다.

▲ 미군정 경찰수뇌부 대부분 친일경찰

해방된 조선 건재한 친일경찰
조선민중의 울분이 쌓였다

허 교수는 또 “미국의 대한정책으로 친일파가 미군정의 요직에 기용됨으로써 친일파 처리 문제는 난관에 부딪쳤다. 미군정은 일제의 통치 구조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친일파들이 일제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처럼 미국을 위해서도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속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일파를 보호하고 육성했다”고 미군정의 속셈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10월1일 대구, 식량대책과 기아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군중에게 경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했습니다. 하지만 피살된 시위자의 시체를 짊어지고 다음날 아침 모여든 민중의 분노는 경찰을 향했지요. 이른바 전국적 저항으로 번진 10월 대구사건의 시발이었습니다.

경찰들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시위대들은 친일 경찰들의 집을 습격해 잡아다가 고문하거나 심지어 화형식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폭력과 약탈은 친일경찰 친일관원들을 정확하게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그 외의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끝내 청산을 거부한 데 대한 민중 스스로의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대구사건은 이후 경북 의성, 영천, 구미, 왜관, 안동, 포항, 성주, 봉화, 부산, 전남, 충남 덕산(예산군),홍성, 천안 등지로 퍼져나갔으며 곳곳에서 친일경찰들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던 당시 친일경찰은 미군정이 구해주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습니다.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초기 경찰희생자가 컸던 건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역사학자 김득중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14연대는 이 지역에서 인민위원회와 노조 등의 조직을 복구한 다음 친일파 처단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점령 시기 지방 좌익은 그동안 원성이 높던 친일경찰이나 우익 인사를 선별하여 처형했지만 재산파괴는 크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여수점령 당시 여수인민위원회가 발표한 <결의안 6개항>에서도 친일파 처단을 가장 먼저 내세우고 있습니다. 결의안 중 2개항이 친일파와 관련된 것이었는데요, 이를 살펴보면 “친일파, 간상 모리배를 비롯한 경찰, 서북청년단, 한민당,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당 등을 반동단체로 규정하고 그들 중 악질적인 간부들은 징치하되 사형, 징역, 취체, 석방 등 네 등급으로 구분하여 처리할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악질 경찰을 제외하고는 사형은 될 수 있는 대로 없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달리 말해 악질경찰은 사형시키겠다는 것이어서 당시 경찰에 대한 분노가 지역 내 상당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도 “(해방 당시)새 나라의 구성 중 적어도 하나의 필수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내용이어야 하리라고 믿어진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일제의 잔재를 뿌리 뽑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일이었다”며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반민족적 친일세력은 민족적 이름으로 심판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여전히 실권적 또는 지도적 지위를 차지함으로서 국민대중은 민족적 정의의 부재를 실감하게 됐다”고 한탄했으니 민중들의 가슴에 쌓인 분노는 결국 친일청산의 부재가 가져온 필연적 울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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