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시민신문
광양IN광양이야기
아픈 역사의 섬 제주, 학살자의 얼굴을 마주하다사진을 통해 풀어보는 여순항쟁3
최인철 기자  |  hwakae72@gycitizen.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10.14  23:33:13
url복사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여순항쟁 반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제주 4.3항쟁입니다. 평화와 생명의 섬 제주, 그러나 사실 제주는 한반도 어느 지역보다 아픈 역사를 누대에 걸쳐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제주 민중의 삶은 고단했고 외세의 침입 앞에 괴로웠던 땅입니다.

일제 강점기 제주는 대륙침략의 전초기지였습니다. 특히 중국과 동남아시아 침략전쟁을 배후에서 뒷받침하는 일제의 보충지 역할을 담당해야 했지요. 해방 당시 제주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수는 7만 여 명을 넘어설 정도였고 제주지역 전체가 일본의 병참기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으니 제주 민중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차마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 서청과 경찰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는 제주도에 비행장과 격납고를 만드는 등 섬 전체를 요새화하는데 진력했는데요, 당시 20여 만 명에 불과했던 제주민중은 날마다 비행장 건설, 동굴 파기 등 일제의 전쟁기지화에 동원돼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해방을 맞은 제주 역시 희망에 부풀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헐벗고 굶주림 중에도 제주도민은 인민위원회와 항일운동가를 중심으로 자치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지요, 일부에서는 인민위원회가 강경한 좌파들이 주도했다고 음해하고 있으나 일제 당시 면장을 지낸 이들도 간부로 활동하는 등 좌우연합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46년 12월의 제주풍경을 이렇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세간에는 제주는 좌익일색이며 인위(인민위원회)의 천하라는 말이 있으나 제주의 인위는 건준 이래 양심적인 반일제 투쟁의 선봉이었던 지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에 분립된 한독, 독촉국민회 등의 우익단체와도 격렬한 대립이 없이 무난히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하고 있다”고 말이지요. 미군정 당국 역시 처음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에 대해 “도내의 유일한 정당으로서 모든 면에서 정부나 다를 바 없는 유일한 조직체”라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일제에 끌려갔던 6만 여명의 제주도민이 돌아왔지요. 물론 해방이 됐다고 해도 당장 구정물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고통의 삶이 금방 끝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통일민족국가 건설과 이후 자주독립국의 지위를 되찾은 조국에 대한 찬란한 희망을 왜 품지 않았겠는 지요.

하지만 미군정의 진짜 속내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인민위원회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장에 부족한 치안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잠시 협조했을 뿐이지요. 그러다가 1946년 8월 1일 제주는 도 승격을 계기로 경찰병력이 증강되고 조선경비대 9연대가 창설되자 미군정은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 치하에서 제주도민의 삶은 정책실패로 위기에 봉착합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3.1사건입니다. 1947년 3월 1일 오후 2시 여러 발의 총성이 제주의 하늘에 흐르던 정적을 깨뜨렸습니다. 제주읍 관음정 앞에서 경찰이 3.1절 행사에 참석한 군중을 향해 총을 쏜 것입니다.

미군정, 경찰·서북청년단 앞세워
제주섬 피로 물들인 학살의 배후

제주읍 북초등학교 행사가 끝나자 오후 2시께 제주민중은 곧바로 가두시위를 펼치던 중 관덕정 부근에 있는 기마경찰의 말굽에 어린 아이가 치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고, 흥분한 민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곧바로 부근에 있던 무장경찰이 총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현장에서 6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빚어졌지요. 이 가운데는 15살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숨진 여인도 있었습니다. 이 발포사건으로 제주민중의 민심은 극도로 악화됐습니다. 그리고 결국 제주 4.3항쟁과 수만의 민간인 학살로 치닫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좌익진영은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특히 3월 10일 총파업이 벌어졌지요. 이 총파업에는 통신기관과 운송업체, 공장노동자, 각급 학교 교사 등 당시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과 단체가 동참하는 대규모 파업이었습니다. 3.1사건에 대한 제주민중의 분노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폭발적이었는지 말해 주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 총파업에 강경대응으로 일관했습니다. 전남북의 경찰 222명, 경기도 경찰 99명을 증파해 총파업 진압에 나선 겁니다. 항쟁 전까지 미군정이 잡아들인 제주민중의 수가 2500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이로 인해 유치장은 차고 넘치게 됩니다.

▲ 변병생 모녀상 :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6일 변병생(당시 25)과 그의 두 살배기 딸은 거친 오름 북동쪽 지역에서 피신도중 희생됐다. 후일 행인에 의해 눈 더미 속에 이 모녀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 모녀상은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두 생명의 넋을 달래고자 제주4,3평화공원에 제작됐다.

수습국면에 접어들자 당시 미군정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이라고 했고, 미군정도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정당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본국에 보고했지요. 자신들의 정책적 실패를 감추는 대신 제주민중에게 ‘빨갱이’라는 불순한 덧칠을 해댄 겁니다. 이름만 들어도 지금도 치가 떨리는 서북청년단이 제주에 들어온 것도 바로 이 사건 직후였습니다.

하지만 4.3항쟁 직전인 1948년 3월에는 검거된 청년 3명이 일선 지서에서 고문과 구타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져 민심이 더욱 들끓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좌익진영은 결국 결사항쟁의 길로 들어섭니다. 다만 목표는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대한 공격으로 한정됐습니다. 경찰과 서청의 만행이 어떠했는지 그들이 정한 공격 대상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랄 수 있겠습니다.

1948년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항쟁은 시작됐습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내걸고 마침내 무장투쟁에 돌입한 것이지요.

항쟁이 발발하자 미군정도 시급히 움직였습니다. 이틀 뒤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는 한편 본토 경찰 1700명의 제주파병을 승인하고 서북청년단도 대거 제주로 내려 보냈습니다. 물론 무장대 진압을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파병된 경찰과 서청단원들은 무장세력 색출을 이유로 제주민중에 대한 대대적인 횡포를 이어갔습니다.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민중들은 이들을 피해 산으로 몸을 옮겨 무장대와 결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강대강 대치사태는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전개된 것이지요. 제주민중의 피로 얼룩진 4.3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최인철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url복사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윤리강령 실천요강광고 및 판매 윤리강령 실천요강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57786, 전남 광양시 중마청룡길 30-7(중동), 2층  |  대표전화 : 061)761-2992  |  팩스 : 061)761-2993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전남 아 00164  |  등록일 : 2012. 1. 25 |  발행인·편집인 : 박주식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주식
Copyright © 2011 광양시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gycitize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