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을 걸으며

▲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아! 가을이다. 눈뜨는 아침마다 숲 속 풍경은 아름다움의 심도를 더하고 그들 속으로 뭔가 좋은 일이 생겨날 것 같은 예감에 나는 시시 때때로 설렌다.

내게 가을이 왔다는 것은 마음 한 가운데로 좋은 시간들이 줄지어 서있는 그림이 그려지는 뜻이기도하다. 기대되는 일, 가야 할 장소, 놓치지 않고 꼭 해보고 싶은 것들, 등등.

그래서 단순히 가을이라 부를 것이 아니라 아! 가을이라 부름이 마땅할 것 같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내게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탄식이 먼저 쏟아진다.

완벽하리만치 맑고 깨끗한 풍경이 세상을 향해 번져가는 모습이 강렬해지는 반면 나는 아직 풍경의 가장 어두운 모서리에 갇힌 듯한 자괴감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변하듯 나도 새로워져야 하거늘 산다는 것에 얽매이 다보니 늘 그 자리에서 발버둥치듯 맴돌고 있을 뿐이다.

앞마당에 있는 성급한 벚나무들은 벌써 울긋불긋 단풍이 들었다. 봄 들어 가장 먼저 꽃을 피우 더니 주변에 늘어선 나무들에게 가을 속으로 들어오길 재촉하듯 가장 먼저 물이 들었다. 서늘해진 바람에 몸을 맏기며 점차 바래어가는 잎들을 보면 그들에게서의 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음을 본다.

새싹을 내고 꽃과 열매를 피우는 여정을 끝내고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와 갈 길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가을은 그런 자리에 찾아와 그들이 지나 온 길을 축복하듯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저 들녘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황금벌판 같아서 길을 나서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농익은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길을 지나다 봉강초등학교 뒤편 논둑으로 선생님과 학생 여섯 명이 한 줄로 거닐고 있는 모습을 본다. 노랗게 익어 고개 숙인 벼 사이로 아이들은 세상을 갓나온 병아리처럼 줄지어 따라 나선다.

아이들은 논두렁에 잠시 앉아서 익어가는 벼이삭을 만져보기도 하고 달아나는 개구리인지 메뚜기 인지를 향해 아쉬운 손짓도 한다. 시간의 흐름을 견딘 누런 벼와 아직 성장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아이들의 어울림이 섬세한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행복이란 성적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집스럽게 지켜가는 듯한 선생님의 뒷모습에서 누가 뭐라해도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길을 가게하려는 욕심과 애정이 엿보인다. 저마다 자식의 성적을 걱정하는 부모들이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는 도시에서는 실행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농촌에서는 일상처럼 자연스럽고 당연시 된다.

놀이가 학습이고 배움이 즐거움이 되는 자연 속에서 초목이 자라듯 자유롭게 커가는 아이들을볼 때마다 내 속이 후련해진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비축되는 자연의 가르침과 상상력들로 저들의 미래는 가을 들판처럼 풍요롭게 익어갈 것이다.

집으로 들어오는 다리 주변에는 뜻밖에도 잔잔 한 노랫소리가 흐르는 물소리와 섞이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듯 두건을 단단히 두른 몇 몇 아주머니들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저도 모르게 흥얼거 리는 소리였다. 그들은 하늘의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큰 고목 아래에서 나무가 내려주는 도토리를 줍고 있었다.

가장 낮은 자세로 둘러앉아 열매를 줍는 모습은 행복한 시간을 바구니에 쓸어 담듯 아늑했다.
인간은 자연의 품 속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하더니 노래가 흘러나온 것도 그 때문인 듯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끔 한바탕 부는 바람에 두두둑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린 도토리들은 어쩌다 나타나는 다람쥐조차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차가 지날 때마다 바퀴에서 우둑 우둑 소리를 내며 터져버렸다. “아이구, 아까운 것” 집사람은 그때마다 간질거리는 엉덩이를 일으키듯 몸을 세우며 안타까워했다.

다리를 지날 때마다 열매를 품었던 나무에게 죄를 짓는 듯 아슬아슬한 기분이 었다. 그 이후론 밟히는 소리가 신경이 쓰여서 아예 차는 밖에 세워두고 작은 돌다리 건너듯 살금 살금 피해 다니곤 했다.

도토리를 며칠 동안 쓸지 않고 두었더니 수북히 쌓였지만 그대로 썩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찌할까 잠시 갈등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어제 마을 아주머니들이 찾아와왜 도토리를 그대로 두느냐며 나무라듯 따지며 아까워했다.

하긴 처음엔 도토리가 다람쥐들의 겨울철 양식 이어서 주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도 했고 주워봐야 그것으로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필요하시면 주워가시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람들이 도토리를 줍는 것은 단순히 양식을 구하자는 의미뿐 아니라 자연이 주면 주는 대로 받으며 살아가는 몸에 밴 방식이었다. 어느 것이든 쉽게 구하지 않으며 넘쳐난다고 함부로 버리 거나 방치하지 않는 오랫동안 지켜온 삶의 철학 이었다.

가끔 시장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도토리묵인데 굳이 힘들게 왜 줍느냐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도토리를 주워 고르고 씻고 말리고 가루를 내고 끓이는 과정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의 싹이 트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일 것이다.

빈 감나무 가지마다 까치밥이 남아 있듯 새들도 작은 짐승들도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것이 자연에서 더불어 사는 즐거움이다.

이렇듯 산촌에서 생겨나는 평화로운 풍경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자연과 인간이 한데 어울리며 공들여 온 댓가일 것이다. 평화(平和)란 말의 참뜻은 살아있는 것들이 함께 어울리며 나누는 것이 아닐까?

산 아래 마을이 있고 나무 아래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한 가을이 주는 선물은 언제나 평화롭고 풍요로울 것이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