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 황미경 독자

새 집에서부터 함께 한 무릎 높이의 고무나무는 거름 한 번 주지 않았음에도 해마다 키 자랑으로 주인을 흠칫거리고 미안하게 한다.

상층이 올라갈 때마다 기둥이 되었던 이파리의 꺼풀이 벗겨질 때면 숭고한 의식을 치룬 흔적을 본 듯 신비 로움에 감탄한다. 한 몸처럼 붙어있던 꺼풀이 잎사귀에서 스르르 미끄러지다 툭 불거져 바랜 빛으로 시들어, 도로롱 말려 쪼그라던 모습은 새 생명의 산고를 본 듯 당혹스러워 입만 달싹거리다 형언할 수 없는 경이로움에 젖어들었다.

혼자만의 감흥으로 끝내기엔 안타까워 “여기좀 봐! 너무 예쁘고 대견하지 않니?”하며 키를 넘긴 나무를 식구들에게 선보이려 커튼을 한껏 젖히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칠 때도 있었다.

총총거리며 설렘 충만한 이는 활짝 웃으며 외친 한 사람일뿐 마른 가슴을 안고 일일을 견뎌내는 식구들은 드리운 커튼의 이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관심이 없었다.

‘내 덕에 이만큼 큰 거야!’하며 눈길 준 것밖엔 없으면서도 뻐길 정도로 키 큰 나무는 뿌듯함의 극치였고 희열이었다. “사람 키보다 큰 나무가 집 안에 있으면 좋지 않아.

그래서 나도 잘랐어.”라는 말을 듣기 전 까지는 말이다.
오월 중순, 막내를 보러 온 큰언니는 이사 후첫 방문이라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그러려니 하며 넘기려 했으나 기어이 팔랑 귀가 되고 만 문제의 발언을 했다.

겨우 내 꽁꽁 닫혀 있던 나무의 성장판들은 따스한 봄 햇살이 드리울 즈음부터 여름이 되면 본격적으로 쑥쑥 자라 어느덧 우러러 보게 되었는데 ‘사람 키보다…’란 말을 들은 뒤부터 그 말이 사실인양 조급증으로 종종거리다 기어이 커다란 주방 가위에 손을 댔다.

탄성 좋은 코르크에 양날이 박히듯 나무의 줄기를 파고 들어간 잘록한 느낌이 손 안으로 전해 졌지만 가위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미동 않는 손잡이를 교차시키려 힘주어 맞잡은 양 손은 “툭”하는 소리와 함께 단번에 가위를 부서뜨렸고, 절반도 잘리지 않은 나무는 무작스런 주인에 의해 여지없이 꺾여버렸다.

반도막이 난 나무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은 모순 속에 모체의 곁에 푹 꽂아두는 걸로 갈등이 마무리 되었으나 우러러봐 왔던 녀석에게 면목이 없어 급하게 베란다 문을 닫아버렸다.

옹색한 변명을 숨긴 뒤로 한 달여 동안 꺾인 모체와 꺾어버린 도막 나무를 살피며 무슨 일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우악스러운 일을 했다는 자책에 어떤 조짐이던 보여야 편한 숨을 쉴 것만 같았다. 한 낮의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한결 같이 높이를 높였던 기특한 나무에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선 안됐다.

여전히 빳빳하고 시들지 않는 이파리들이 펼치는 생명력에 희망을건 어리석은 주인장의 허튼짓이 무마될 날을 손꼽았다.

변화 없는 한 달여를 조석으로 애 끓이며 전전 긍긍하던 한 날, 굵직한 이파리들 곁과 층층 사이로 봄기운 연한 연둣빛 새순이 보였다. 마른 탄성이 절로 나오며 감사와 대견한 마음이 눈시울을 데웠다.

삽목한 나무에서도 새로이 한 층을 높이려 새 잎이 삐죽이 솟아나고 있는 걸 본 순간 허허로운 웃음이 삐져나오다 터졌다.

혼자 웃은 웃음엔 졸였던 시간과 놓지 못했던 근심과 ‘가 보지 않은 길’에서 느낀 조바심이 헐러덩 거리다 날아갔다. 가벼워진 눈으로 한 발 물러나 바라 본 나무의 자태는 고귀한 생명력이며 이치의 신선함이었다.

줄기가 꺾였으니 직진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 사였지만 속살 허옇게 드러낸 꺼칠한 나무줄기에서 위안이 될 생명의 꿈틀거림을 고대했다니, 몸체의 잘림을 보면서도 여전한 생명력이 움 틀수 있을 거라 뚫어져라 바라본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갑작스런 변고로 인해 살 길 찾느라 분주해진 이파리들은 맨 아래에서부터 틈마다 좌정해 일시에 새잎을 돋우기 시작했으며 소리 없이 새로운 가지를 뻗치며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긴 망설임 없이 배신한 주인장을 신파조로 탓할 연유 따윈 아랑곳없이 묵묵히 신작로 내느라한 달여 동안 침묵의 공작을 해 왔던 것이다.

애간장이 탔던 건 해코지한 나무가 더는 자랄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미련 함에서 출발한 미지의 끝은 ‘때마다’에 해당되는 각각의 이치를 헤아리지 않고 눈앞만 쫓느라 더욱 그랬다.

하냥 나무를 들여다보며 징조 없음에 속 끓이던 중에 고무나무의 생명 공작을 본 순간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란 톨스토이의 질문이 뒤통수를 쳤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답을 떠올리며 한 달여 애 끓인 시간이 허탈해졌다. 살아갈 거란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아 충동적으로 애먼 녀석을 고통에 빠뜨렸단 자책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때였기 때문이다.

팔랑 귀도 부족해 삶의 연륜이 주는 이치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니 스스로 무안하기 까지 했다.

사춘기 때부터였을까? 앞날을 비춰주는 수정 구슬 하나 있으면 바랄 게 없겠다는 생각을 한 게말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등을 고민하며 답을 찾지 못해 갑갑증을 느끼던 때, 점쟁이들의 주문과 함께 ‘내 갈 길’이 한 눈에 드러났음 하는 바람을 꿈꾼 적이 있다.

선택지를 받게 되면 요즘도 수정구슬이 보여 주는 명확한 길은 가보지 않아도 내 길임에 틀림이 없고, 그 길은 실패하지 않는 단단한 길일 거란 얼토당토 않는 자위로 잠시 구름 위를 걸을 때가 있다. 단 한 번도 실행되지 않은 그 허망한 꿈을 선택의 갈림길에선 한 번도 도리질 쳐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가보지 않은 길에서 겪지 못한 무수한 많은 것들을 나는 귀히 여길 마음이 없었고 도리 없이 받아들여야만 할 일들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경험은 보고였다.

그런데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생각과 달리 남들 에겐 “그 모든 경험은 소중해!”하며 외쳤다. 정작 나는 원치 않았고 어쩔 수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 없이 맞닥뜨려야만 했던 일들을 부정적으로 치부해 암울한 생각에 빠졌던 지나간 시간이 일시에 소환되며 울컥해진다.

끝없이 이어진 가닥의 길에는 점처럼 작은 내가 서 있었다. 어디로 어떻게 내딛을지 두려움에 쌓여 존재마저 흐릿했지만 돌이켜보니 고비 때마다 그 길은 차선이었지만 최선이었다.

다만 미덥지 않은 상황에서 가고 싶지 않은 길을 접할 때마다 얻은 경험치들에 대한 성찰을 긍정으로 수용한 적이 없었다.

‘무엇만 하지 않았더라면’을 대입시키며 당시 보다 더 나은 현실이 있을 수 있었음을 아쉬워만 했지 ‘가지 않아도 되는 길’에서 열매처럼 얻은 결실의 소중함을 몰랐다.

아무도 가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고 무엇이 있는지 짐작되지 않아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꺾어버린 고무나무를 통해 되씹어 본다.

길 너머에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아도 두려워하지 않고, 바투 응답이 없어도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음을 시간이 준 이치 속에서 깨닫는다. 충실한‘오늘’을 산다면 아무런 염려나 두려움 갖지 않아도 될 것을 너무나 많은 애를 끓였다.

팔랑 귀가 된 “집 안에 키 큰 나무가 있으면 좋지 않다”는 말의 근원은 알 수 없지만 집안 정리 정돈을 잘해 바람의 기운이 돌게 하라는 의미로 가늠한다.

가급적 책장이나 큰 나무는 집 뒤쪽 베란다에 두고 앞쪽 베란다나 거실 창문을 막아 바람 통로를 방해하지 말란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것을 대견했던 고무나무가 동티라도 될까봐 안절 부절 못하다 우악스런 주인에게 된서리를 맞게한 것이다.

‘다음’을 기약의 버팀목으로 삼으며 기다림의 위안을 찾았지만 가벼운 속내는 금세 안달이 나보이는 것에만 급급했다가 사람살이는 그게 다가 아니란 조용한 타이름을 또 다시 들었다.

쉬이 조급해하지 말 것이며 굳이 갈 길에 대한 세세함을 알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미래를 보여주는 수정구슬이 주는 자위를 이제는 떨칠 때가 되었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