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통해 풀어보는 여순항쟁4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 핏빛 바다로 변한 섬 ‘제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 대가 12개의 지서와 서북청년회, 독립촉 성국민회 등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제주항쟁은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 연대의 토벌작전으로 격화되면서 역사의 무대에 민족의 비극을 올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지점은 무장대와 토벌대가 협상을 통해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찾는데 합의했으나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가 저열한 훼방행위를 벌이면서 협상이 깨진 것입니다.
바로 오라리 방화사건을 일으킨 것이지요.

▲ 여수14연대 모군 광주4연대 시가행진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지만 만약 오라리 방화사건을 발생하지 않고 이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했다면 한국전쟁을 제외한 최악의 민간인 학살을 불러온 제주항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러했다면 여순항쟁 역시 역사에 등장하는 아픔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후 토벌대의 진압 작전은 더욱 거세게, 더욱 악랄한 방법으로 진행됐습니다.

특히 1948년 5월 10일 민족분단을 전제로 한 남한단독선거 이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른바 초토화작전을 수행하면서 제주도민을 상대로 한 무자비한 학살이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특히 서북청년단원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2연대 3대대의 악랄함과 잔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요, 북촌마을 주민 400여 명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불러 모아 재판도 없이 집단 총살한 북촌학살 역시 이들의 만행이었습니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4.3항쟁 발발 이후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됐고, 이가운데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학살과 만행으로 인한 제주도민의 목숨이 제주의 푸른 바다를 피로 물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항쟁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음의 강을 건너야 했던 희생자 수는 2만5000명 에서 많게는 3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 되니 이 억울한 영혼들이 떠도는 제주의 아픔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수14연대는 광주 제4연대가 진행한 모병을 통해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에 창설됩니다.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둔 상황에서 여수 14 연대가 창설된 것이지요.

당시 이 광주 제 4연대에는 제주토벌을 거부하고 봉기하 면서 여순항쟁을 촉발시킨 경비사관학교 제3기 출신인 김지회와 홍순석이 주둔하고 있었지요.

여수 14연대가 주둔한 신월리는 민족 침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아픔의 땅이었 습니다. 신월리는 현재 한국화약 주변 일대인데요, 일제 말기에 일본 해군의 항공 기지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여수 구봉산 허리와 바다를 끼고 도는 외길 안쪽에 위치한 신월리 기지를 미군은 이곳을 앤더 슨기지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제주토벌 출동명령 거부 민중의 군대로 행동할 것

여수14연대의 창설을 위해 광주4연대 에서 안영길 대위 이하 제1대대가 차출됐고 이 가운데 김지회와 홍순석 등 좌익계 장교와 지창수 하사관, 좌익성향의 병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초대 연대장 임명에는 청산하지 못한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요, 바로 일본 해군 중위 출신인 이영순이 연대장에 임명된 것입니다.

이러한 14연대 주둔 상황에서 여수를 비롯한 순천, 광양, 보성, 구례, 곡성, 고흥등 전남 동부지역은 해방 이후 여운형이 이끌던 건준위에서 진화한 인민위원회가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1948년 초까지도 전남동부지역은 다른 지방에 비해 좌우익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비교적 평화 공존적 관계를 유지 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 저지투쟁과정에서 나타난 민중들의 투쟁과정에서 별다른 마찰이나 갈등이 발생하지 않았던 게지요.

이를 근거해 인민위원회와 그와 연관된 조직이 경찰이나 우익계 인사들과 마찰을 빚지 않으면서 조직이 파괴되지 않고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1948년 전반기의 정치투쟁과정에서 전남동부지역은 다른 지방에 비해 온건좌익과 이를 뒷받침하는 민중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남로당의 입김은 미약해 혼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좌익계 소탕작전이 본격화되면서 전남동부지역 인민위원회 등 좌익성향의 인사와 단체는 지하 속으로 들어갑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투쟁의 좌절된 이후 비록 정권의 탄압을 피해 지하로 몸을 움츠렸지만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하는 상황이라 할수 있는 짧은 시기를 맞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14연대 봉기 이후 인민위원회는 봉기군과 연합해 항쟁을 이끄는 주도세력이 됩니다. 한편 당시 미군정 외에 정치적 기반과 명분을 모두 실기한 채 탄생한 이승만 정권은 정권의 안정적인 체제구축을 위해 제주항쟁을 토벌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1948년 10월에 들어서면서 제주도 일대에 계엄 령을 선포하는 등 토벌을 강화를 위해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여수14연대에 새로운 명령이 떨어집니다. 평화적인 문제해결을 찾기보다 “제주 30만 도민을 모두 죽여도 좋다”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계속 추가 병력을 투입해 진압에만 사활을 건 것이지요.

여수14연대 병력 역시 이승만 정권의 강경일변도 정책에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10월 15일경, 국방경비대 사령부로부터 제14연대에 10월 19일 오후 8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 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제주도 출동은 다름 아닌 “동족을 학살 하라”는 명령과 결코 다른 뜻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정권의 안정만을 위해 국민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군인 들에게 동포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여수 14연대는 학살과 봉기 가운데 어느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벼랑 끝에 몰려야 했던 것이지요.

여수 14연대는 결국 10월 19일 밤 제주도로 출발하는 해군 상륙정에 몸을 실어야 하는 순간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었습니다.

여순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기도 했습니다.

1대대 사병 전원이 연병장에 집결한 가운데 14연대는 필연적으로 빚어질 동족 상잔의 제주도 출동 반대와 경찰타도, 남북통일을 위해 민중의 군대로 행동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대다수 사병이 이에 적극 동조했음은 물론 나머지 2개 대대도 합류, 봉기군은 순식간에 2500여 명으로 불어났지요.

14연대 봉기군은 곧 군 편성을 재정비하고 마침내 밤 11시 30분경 여수 시내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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