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통해 풀어보는 여순항쟁5-여수블루스 그리고 여수야화

여수는 항구였다
철썩 철썩 파도치는 남쪽의 항구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옛날을 불러 봐도 옛날을 불러 봐도
재만 남은 이 거리에
부슬부슬 궂은비만 내리네

여수는 항구였다
마도로스 꿈을 꾸는 꽃 피는 항구
안개 속에 기적소리 옛 임을 싣고
어디로 흘러가나 어디로 흘러가나
오막살이 처마 끝에
부슬부슬 궂은비만 내리네
<여수블루스 1948>

 

무너진 여수항에 우는 물새야
우리 집 선돌 아범 어데로 갔나
창 없는 빈 집속에 달빛이 새여 들면
철없는 새끼들 웃고만 있네

가슴을 파고드는 저녁 바람아
북정 간 딸 소식을 전해 주려무나
에미는 이 모양이 되었다 만은
우리 딸 살림살이 허버지드냐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
오늘에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
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
우리 집 태운 사람 얼굴 좀 보자
<여수야화 1949>

여순의 참상으로 들어가기 전 잠깐 노래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항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여수의 모습을 그리고 읊어낸 노래들입니다. <여수블루스>는 작자가 뚜렷하지 않지만 광양 진월 출신 경찰이었던 강석오가 가사와 곡을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월망덕포구를 지키고 서 있는 <내 고향 망덕포구>라는 시비의 주인공입니다.

여순항쟁 연구가인 주철희 박사에 따르면 당시 경찰이었던 강석오는 진압된 뒤 현장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까지 모두 폐허가 돼 버린 스산한 여수의 모습을 이리 읊조렸던 것이지요.

젊어 비명에 간 아버지의 혼이 휘도는 바람을 타고 날아와 을씨년스러운 울음소리가 가득한 폐허 위에서 애비 잃은 소년은 오소도손 살아가던 그 옛날을 애타게 떠올리지만 현실은 재만 남아 뿌연 연기를 덮는 궂은비만 내리고 참혹한 여수의 모습이 서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9년 <여수야화>는 여수의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1949년 1월 경향신문에 따르면 여수야화는 “서울시 경찰국에서는 아세아레코드 회사제품 여수야화는 레코드 가사에 있어 불순할 쭌 아니라 나아가서는 민심에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서 1일 동 레코드를 판매금지 시키기로 되었다고 한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김초향 작사, 이봉룡 작곡의 이 <여수야화>를 취입한 가수는 당대 최고의 남인수였습니다. 작곡가인 이봉룡은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 등 여전히 대를 이어 남도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를 작곡했고 이를 부른 이난영의 오빠이기도 합니다.

<여수블루스>에 비해 <여수야화>는 당시 여수의 모습을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음반활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금지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무너진 여수항에 선돌 아범은 오갔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철없는 새끼들이 웃고만 있다는 표현은 당시 여수의 뼈아픈 모습을 절절하게도 잘 담아내고 있지요.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무엇인지도 알 까닭이 없었던 민중들에게 그날 여수는 이토록 잔인했습니다.

무엇보다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 오늘 우리식구끼리 왜 싸움을 하나요?’라고 직설적으로 묻는 질문 앞에 차마 할 말이 없게 됩니다. 일제의 치하가 끝나 민족해방이 찾아올 줄 알았으나 끝내 분단으로 갈라지더니 같은 동포끼리 총칼을 들이대고 형제를 학살하는 역사의 현장, 이 같은 천인공노할 짓을 서슴치 않았냐고 직설화법으로 묻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승만 정권 “여순의 배후는 백범”

다시 당시 여수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일 늦은 밤은 기해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며 봉기한 여수 14연대의 선언에 당시 2700여 명의 부대병력이 뜻을 함께하며 합류합니다. 봉기군은 이후 빠르게 여수를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20일 새벽 1시 20분경 여수 읍내로 진입한 봉기군은 가장 먼저 여수경찰서를 접수하고 곧바로 각 관공서를 점령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한민당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후원회장 등이 주요표적이 돼 70여 명이 사살됐습니다.

봉기군이 여수일원을 장악하자 이승만 정권의 사상탄압에 지하로 은둔했던 인민위원회가 그 모습을 드러내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게 되지요. 인민위원회는 사실상 지방자치정부체제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지요.

일각에서는 여순항쟁이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발발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여순항쟁은 남로당의 지령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남로당은 급작스럽게 상황이 전개되자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제주동포의 학살을 거부”하기 위해 출병을 하루 앞둔 여수 14연대가 독자적 봉기에 나섰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민중들이 이에 합세하면서 전남동부권 일대로 세가 확산됐다고 보는 게 외려 타당할 것입니다.

여순항쟁의 발발은 정통성에 대한 의심과 함께 출범 3개월여가 채 되지 않던 이승만 정권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진압작전이 극에 달한 잔인함을 드러내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압작전 당시 미군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던 이승만 정권은 여순항쟁을 자신의 정적을 공격하는데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정권은 극우 세력 일부가 이 반란에 동조했다는 주장을 유포한 것이지요.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먼 몰락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배후설을 흘렸습니다. 정권이 지목한 배후는 황당하게도 백범 김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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