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년 째 세풍지역 찾아 어르신께 영양주사…아름다운 손길

최주원 원장 “어르신들 좋아해 주시니 매번 제가 힘을 얻는다”

추적추적 겨울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하루 종일 내리는 가을 깊은 오후, 이제 까치밥밖에 남지 않은 감나무에 새들도 조용한 시골마을 골목이 웅성거렸다. 어떤 이는 지팡이 짚고 어떤 이는 신산스러웠던 지난 삶의 무게가 고스란한 듯 허리께에 두 손을 모은 어르신들의 가벼운 발걸음 때문이다.

서리 맞은 듯 하얀 머리카락이 유난했으나 가을걷이를 끝낸 탓인지 그래도 얼굴표정은 다들 바람처럼 가볍다. 가뭄 지독했던 여름이 가고 어느 덧 가을도 휘엉청 저물더니 바투 겨울 오는 길목이어서 모두들 두터운 외투를 꺼내 입었으나 이깟 가랑비쯤은 다들 귀찮아서 우산을 받쳐 쓴 손은 보이지 않았다.

잔뜩 고요했던 골목에 삼삼오오 어르신들이 대문을 열고 나오자 때 아닌 집단이동에 놀란 탓일까. 비를 피해 처마에 들었던 개들이 컹컹 짖어대며 물기 머금은 몸을 털어내니 마을 어귀마다 무겁게 내려앉았던 고요가 물이랑 치듯 일순 흐트러졌다.

“이장이 방송허는 소리 듣고 나온가?”
“하이고 그러는 성님도 공짜 주사 나중당께 몸이 영 날래요이”

실없는 농담 끝에 정겨움이 잔뜩 묻어났다. 그렇게 늙어 좀처럼 가벼울 수 없는 몸을 이끌고 어르신들의 발길은 2백년 된 당산나무에 휩싸인 마을회관을 향했다. 어르신들을 맞은 것은 마을 이장이다. 오십을 훌쩍 넘겼지만 동네에선 건장한 청년에 속했고 어떤 어르신들에겐 아들과도 같은 손영태 이장이다.

손 이장은 일찍 회관에 나와 방방마다 보일러를 켜고 방이 따스하게 온기를 찾아가자 스탠드형 옷걸이를 방 곳곳에 배치했다. 어르신들이 회관에 들어서자 눈인사를 하다말고 젊은 이장이 기어이 한 마디 했다.

“엄니, 나가요 옷걸이만 준비허믄 쓴다는 발전협의회 사무국장 말만 믿고 일반 옷걸이 60개나 안 샀겄소. 근디 오늘 아침에사 헌다는 말이 요놈(스탠드형 옷걸이)을 필요허답디다. 비가 와부러 갖고 일 못 나간 것도 썽이 나는 판에 이만허니 헛돈까지 쓰고 봉께 이따가 한 마디 해야 쓰겄소”

“와따, 그려도 좋은 일 헌다고 고생 헌 사람헌티 그라믄 쓰가니...이장이 좀 참소”
“엄니, 그래야 쓰까라. 그라믄 엄니 봐서 나가 참을라요 허허”

세승마을 회관은 금방 어머님들의 웃음소리가 바람 앞에선 풍경처럼 한들거렸다.

가을걷이도 다 끝나고 한적해진 시골인 세승마을회관이 어느 때와 달리 사람소리 가득한 까닭은 미래여성병원에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의료봉사를 실시하는 날인 탓이다.

세풍발전협의회와 동백로타리클럽, 그리고 미래여성병원이 결연을 맺고 해마다 광양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세풍지역을 찾아 가을걷이를 끝으로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한 어르신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미력하나마 지친 몸을 추스르는데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무료로 영양제를 투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세풍리 7개마을 가운데 세승과 부흥마을 어르신들 7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이날 봉사에는 동백로타리클럽 회원과 최주원 미래여성병원장를 비롯한 의료진 그리고 양동구 세풍발전협의회장 등 회원들이 함께 했다.

벌써 3년째 의료봉사를 함께 해온 까닭에 주민들도, 동백로타리 클럽 회원들도 병원식구들도 다들 얼굴에 반가움이 맺혔다. 더구나 의료봉사의 경우 무엇보다 봉사에 참여한 회원들간 손발을 맞추는 게 중요한데 다들 익숙한 지 의료진은 곧바로 영양주사를 놓을 채비를 서두르고 로타리 회원들은 차례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위해 다과준비에 들어갔다. 발전협의회원들은 이들이 봉사하는데 혹여나 불편함이 있을까 그림자처럼 붙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봉사소식에 마을이장이 미리 회관에 보일러를 돌려 구들을 따스하게 덥혀 놓은 탓에 어르신들은 제집 안방인 듯 편안하게 누워 지친 몸속으로 한 방울 한 방울 들어오는 영양제를 맞으며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겨우 참는 눈치다.

귀찮다며 게으름을 피우는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회관을 찾았다는 세승마을 주애심(80) 할머니는 “벼농사에다 감 등 과수농사가 끝나면 몸도 마음도 지치기 마련인데 이렇게 시골 노인네를 찾아와 영양제도 놔주고 말벗도 돼주니 고맙지 않을 수 없다”며 “외출이 쉽지 않은 시골 노인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선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흐뭇했다.

부흥마을 홍금순(82) 어르신도 “영양제도 영양제지만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찾아와 말벗도 돼주니 마스크팩도 해주는 게 너무 고마운 일 아니냐”며 “금방이라도 힘이 나는 느낌이다. 특히 해마다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원장님과 간호사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 같은 의료봉사를 진두지휘는 사람은 최주원 원장이다. 비록 베테랑 의료진들이 함께 하는 봉사지만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일은 역시 그의 몫일 수밖에 없다. 이번 봉사에서도 지체장애2급으로 바깥출입이 어려운 어르신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최 원장은 직접 어르신 댁을 방문해 영양주사를 직접 투여하고 이것저것 불편함이 없는지 살폈다.

최 원장은 “3년 전 세풍지역 어르신들과 처음 인연을 맺은 뒤 해마다 찾아오다 보니 이제 다들 제 아버님 같고 어머님 같다”며 “무엇보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농사일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생각해 영양주사 봉사를 생각했는데 다들 너무 좋아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매번 힘을 얻고 간다”고 말했다.

그는 “동백로타리와 세풍발전협의회가 맺어준 참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한다”며 “아직 찾아뵙지 못한 마을과 어르신도 있는데 고향의 부모님을 찾는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세풍어르신들과 인연을 이어갈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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