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좌우익 공동참여 속에 자치위원회 구성
김완근·이은상 중심 공백위기 행정과 치안유지

해방을 맞은 후 광양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별다른 좌우익의 대립 없이 양측 모두 협상과 협의를 통해 치안과 행정공백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었지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뒤 1938년 광양에 은둔하다 시국수습 군민회의를 주도했던 우파성향의 이은상과 좌파를 대표하던 정진무가 각각 부위원장을 맞는 대신 항일독립운동가로 지역 내 신망이 두터웠던 김완근을 위원장으로 한 자치위원회가 꾸려졌습니다.

이들은 해방 이틀 뒤인 17일 광양서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수천 명의 광양군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해방축하 광양군민대회를 여는 등 공식 활동에 들어가게 되지요. 이 자리에서 군민들의 추인을 받아 광양군청사에 사무소를 두고 활동하다 20일 몽양 여운형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결성이 확산되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의 영향을 받아 광양건국준비위원회로 자치위원회를 변경합니다.

그러나 미군정이 개시되기 전 광양건준이 광양인민위원회를 개편되자 우파성향의 이은상이 탈퇴하고 좌파성향의 인사들이 조직을 주도하기 이르면서 광양지역에서도 좌우익의 갈등이 서서히 검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게 됩니다. 비록 다른 지역처럼 좌우익간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등 갈등이 극에 달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지요.

그리고 여순항쟁 발생 전 광양에서도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1947년 5월 1일 옥곡지서 부근에서 일어난 일이지요. 당시 옥곡면민들은 노동절을 기념해 대규모 행사를 개최했는데 그때 모인 군중들이 1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규모에 놀란 경찰이 해산을 명령했으나 군중들은 이를 거부한 채 시위를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결국 경찰은 법적 근거도 없이 정당한 집회보장과 조선분단책동에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고 기어이 발포하면서 신금마을 주민 서승식 등 주민 3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만행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것이 해방 이후 광양지역에서 최초로 발생한 민간인 학살로 기록됩니다.

친일경찰을 대표되는 친일반민족 세력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이 터져 나왔지만 미군정 실시 이후 광양 역시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찰과 극우세력의 눈을 피해 사실상 인민위원회는 지하로 숨어듭니다. 여순항쟁이 터지기 전까지 말입니다.

여순항쟁 발발소식은 순천과 마찬가지로 20일께 광양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광양경찰은 여순소식이 전해지자 20일 이를 진압하기 위해 순천방면으로 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이들 경찰은 순천에 다다르기도 전에 매복해 있던 봉기군에게 기습을 당해 경찰 수명이 목숨을 잃은 채 퇴각하고 맙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라면 패배한 뒤 봉기군의 광양진입을 막기 위해 군부와 연락을 취하고 방어막을 구축하는 것이 순리였겠지요. 그러나 광양경찰은 적들이 들어오는 주요 진입로에 차단하고 수성전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봉기군에 비해 열악한 무기와 병력만으로 수성전을 펼치는 것이 다소간 무리가 따를 것이라 판단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민중을 향한 어이없는 광기를 드러내는 일은 필연코 일어나지 않았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양경찰은 여순항쟁 발발 이후 최초로 민간인을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여순항쟁 최초 민간인 집단학살지 ‘덕례리 주령골’
광기어린 광양경찰 패퇴한 뒤 좌익혐의 몰아 총살

패전과 동료를 잃은데 대한 앙갚음으로 당시 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좌익혐의자들을 광양읍 덕례리 반송재로 데려가 잔혹하게 학살한 것인데요, 이것이 바로 여순항쟁 최초 민간인 학살로 알려진 주령골 학살사건입니다. 주령골에서 학살 당한 민간인은 모두 20여 명으로 알려졌는데 최근에는 27명이라는 정확한 사망자수를 지목하고 있기도 합니다.

주령골 학살, 그렇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광양경찰에 의해 발생한 참혹한 민간인 학살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학살한 친일경찰을 비롯한 가해경찰의 후손들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주령골 학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들이 없음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혹한 주령골 학살의 기록은 이경모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채록돼 있지요. 잔인한 경찰의 보복으로 학살피해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은 평생 한을 품고 살아야 했을 그 단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입니다.

당시 이경모는 이은상의 추천으로 호남신문사 카메라 기자로 활동하던 중이었고 20일 출근해서야 여순항쟁 발발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후 이경모는 “사진기자가 현장에 가지 않고는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이는 독자들에 대한 직무유기다”며 여러 방면으로 통로를 알아본 뒤 21일 저녁무렵에야 순천에 도착해 22일에야 사태의 참혹함을 카메라에 담게 됩니다.

당시 순천시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수색작전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자칫 총격전이 벌어지는 상황이 전개되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었음으로 현장을 촬영하기가 그리 녹록치 않았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당시 여순항쟁 현장에 있는 카메라 기자는 이경모 뿐이었습니다.

이경모는 23일 부모님을 봬야겠다는 생각으로 고향 광양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비록 정황이 엄중했으나 여기까지 내려와서 부모님 얼굴조차 뵙지 않고 떠날 수는 없었음으로 11킬로 넘는 길을 걸어서 광양으로 향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가 걷는 고향길은 그 옛날 고향길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길가에는 경찰과 봉기군의 시신이 즐비했고 남은 유가족들의 피울음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 끌었던 게지요.

이경모는 당시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계속 정신없이 광양을 향하여 한발 한발 속도를 더하여 재빠르게 걸어갔다. 광양과 순천 경계 부근에서 통곡하고 있는 친구의 어머님과 누나 그리고 동생을 만났다. ‘왜 울고 계시느냐’라고 여러 번 물어도 대답을 안 하던 친구 어머님이 한참 만에 손으로 도로 옆 골짜기를 가리켰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골짜기로 뛰어들어 가보니 손아래 친구 김영배 군의 할아버지와 그집 머슴이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총살당한 김 군의 시신을 찾아내 수습하고 있었다”

이경모의 친구 김영배는 당시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울대학교도 신탁 지지파와 반탁 지지파가 서로 심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신성한 배움의 터마저 좌·우익으로 나뉘어 극심한 싸움을 벌이거나 심한 경우에는 대낮에 테러까지도 주저하지 않았을 만큼 대립이 극에 달했던 상황이었지요.

김영배는 당시의 대학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에 내려와 공부하다가 학내 사정이 좀 안정되면 다시 상경하려고 생각하던 중 좌익 사상범 용의자로 광양경찰서 예비검속에 걸려 광양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광기에 사로잡힌 경찰에 학살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경모는 친구의 시신과 유족의 슬픔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수도 없이 “미안하다, 영배야”를 외쳤다고 후일 털어놓았을 만큼 당시 주령골 학살사건에 커다란 부채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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