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문학 작가들이 전하는 광양이야기

▲ 황미경 까치문학 작가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자전거 외엔 방해꾼 하나 없는 제방의 오른쪽 들판엔 가을걷이를 끝낸 수확의 여유로움이 널브러져 있다.
‘첨벙’소리에 왼쪽으로 눈 돌리니 장본인은 오간데 없고 형태 잃은 물덩이만 우루루 떨어진다.

들어찬 밀물로 절반 이상이 잠긴 갈대숲 에선 생기로운 오리 떼들의 유영으로 두 갈래 방사형 물살이 고요히 수놓으며 뒤따른다. 햇살이 빚은 은빛 물비늘은 기다란 물그림자로 깔랑거리며 하천에 누운지 오래다.

제방 비탈길엔 힘찬 손가락 군무 펼치며 갈대꽃이 하늘바라기 중이고 곁에선 노오란 암술을 빙 두른 색색의 보드란 코스모스 꽃잎이 가을향 퍼트리기에 여념이 없다.
맑은 소리의 여운마저 잔잔 하게 가라앉은 도청의 하천엔 나른한 평화가 그득하다.

봉강면과 옥룡면에서 흘러든 서천과 동천, 사곡천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바닷물과 합수되는 이곳은 재첩이 서식하기에도 알맞은 지역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근 광양읍, 봉강, 옥룡 등지의 주민들이 이곳에서 많은 재첩을 채취해 어려운 시절, 양식으로 대용했다.

광양제철소나 광양컨테 이너 부두 건설의 영향을 비교적 받지 않은 이곳은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맛과 질이 좋은 자연산 재첩 종패가 채취되어 부산이나 인근 진월, 다압 등지로 팔린다.

올해 78세인 박샌떡은 방천 끝자락에서 잡아온 재첩을 오늘도 솥에서 삶아 바가지로 거른 뒤 얼려 놓았다. “겨울로 갈수록 조금씩 늦게 물이 빠져 물때를잘 맞추어야 해.” 하며 물때를 잘 못 맞추면 위험하단 말도 잊지 않는다.

21세에 결혼해 어린 애 둘일 때 여수 가는 길에 있는 신풍에 살다 도청에 둥지를 마련한 박샌떡은 기찻길로 마을 풍광이 망가진 걸 제일 속상해한다. 1970년대 후반 광양읍 인동리에 위치했던 광양역은 2011년 복선 비전철로 이설과 함께 도월 리로 이전했다.

이후 순천역이나 진주역 과도 복선화가 이루어져 신설된 철로는 마을을 쑥 꺼진 형상으로 만들었고 최근 신설중인 국도 2호선도 마을 풍광을 해치고 있다.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며 한 치의 땅도 놀리지 않는 부지런쟁이인 박샌떡은 올 봄에도 도월교를 지나 자투리땅에 옥수수를 심었지만 유난히 길었던 가뭄 으로 수확의 기쁨은 맛보지 못했다.

유모차를 끌고 도월교를 건널 때마다 박샌 떡은 작년에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난 남편 생각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고생하며 다리 놓던 때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남편이 이장이었기에 큰 공사 중에 여러 모로 속앓이도 많았다.


여자들도 다라이에 돌을 넣고 들고 다니며 공사한 다리는 광양군으로부터 교량을 설치하는데 필요한 관급자재인 철근과 시멘트 등만 지원받았기에 더 그랬다. 도월주민이 자체적으로 1977년 9월 28일 120m의 교량을 건설하여 광양읍으로 오가는 요긴한 교통로를 완성했는데 최근 세련된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도청마을 앞 서천은 예전에 모래와 자갈이 엄청나게 많아서 국가시설이나 공공용으로 채취되어 타지로 나갔다. 그영향으로 도청마을의 샘은 말랐고 주민들은 식수난을 겪기도 했다. 예부터 날아들었던 갈매기들도 모래 유실로 먹이가 고갈되어 한때는 일부가 서천 상류지인 마산마을 앞까지 날아가 먹이를 찾았다.

서천 아래 하천에서는 겨울이면 물에서 얼어 죽은 청둥오리로 특식을 해먹을 때도 있었는데 겨울 별미로 그만한게 없었다. 별미와 그다지 연관 없는 지금은 긴 겨울을 지내러 날아온 오리떼들이 더해준 가을정취를 선물로 안을 수있다.

그러나 유용한 땔감이었던 갈대가 군락을 이루던 하천이 밀물 때여서 폭우로 하수도에 가득찬 물이 빠지지 못해 마을길이 물에 잠겼던 때도 더러 있었다.

수재민이 된 주민들은 중요한 몇 가지만 급히 챙겨 서초등학교 강당인 유신관 (현 백운관)으로 이동하거나, 지금은 장례식장인 군부대로 피신을 갔다.

아직도 굵은 빗줄기가 내리면 마당에 난 하수도 구멍을 주의해서 살펴볼 정도의 그런 날이 있었다. 주민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 었던 하천은 2017년 4월부터 세풍리 일원에서 시행된 하수관로 정비 사업 결과 25km 하수관로에 배수설비를 했으며 펌프장도 8군데나 설치해 말끔하게 제방 쪽은 정돈되었다.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마을 일대에서 1970년대 이후 사라진 ‘긴꼬리 투구새우’가 발견되었다. 요즘은 친환경 야채와 방울토마토 따기 체험학습장으로 인기가 높고 벽화사업으로 단장된 담벼락은 인근 어린이들의 마을 둘러보기와 사진 찍기 장소로 각광받는다.

붕어, 잉어, 민물장어 등이 서식하고 있다는 소문답게 낚시줄을 드리운 이들도 가끔 볼 수 있는 하천에서 옛날에는 문저리나 맛조개 등도 잡았다. 놀다 지친 하천에서 아이들은 실장어를 잡아 한마리당 1원, 5원, 100원 등에 팔아 용돈에 보탰는데 “뜰채로 뜨거나 바께쓰로 퍼서 애들이 실장어를 사러온 어른들에게 팔았어.”하는 박샌떡의 눈이 그렁그렁해진다.

발흰게라고도 부르는 밤동게, 방아 찧듯이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해서 찔룩게라 부르는 칠게 등이 쉴 새 없이 뽕뽕거리며 구멍을 드나들고 뽈뽈거리는 갯벌 저쪽에서 박샌떡은 가만히 있으면 온몸이 아프다며 봄부터 가을 무렵까진 노구로 재첩을 잡는다. 시간이 흘러 도월교도 단장되었지만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마을 입구에 선 벅수처럼 노쇠한 박샌떡은 한겨울만 아니라면 이팔청춘 기상도 드높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즈음인 1636년 경에 밀양 손 씨가 처음 들어온 이후 김해김씨와 홍씨 등이 입촌한 이곳은 백운 산에서 흐르는 물이 너무나 맑고 깨끗하여 도청(道淸)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유교이념인 도의(道義)를 실천하면서 맑고 깨끗한 인품을 갖는 마을이 되라는 주민 교화의 의미도 있다. 1914년 행정 구역상 도청리와 월평리를 병합하여 각각 그 첫 자를 따서 도월리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제방 옆 도청은 오래전 별일들도 다 알고 있는 ‘도청’ 그대로이다.

사계절 옷 입는 갈대를 보며 사색하며 걷기 좋은 하천 일대는 산업시설이 많은 광양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실눈으로 보기 십상이다. 어느 볕 좋은 날 물 빠진 하구에서 반복된 동작을 하며 무언가를 하고 있던몇 사람이 재첩 잡이 중이 었단 사실을 알기 전 까지는 적어도 그럴 수 있다.

공단지역에다 마을을 둘러싼 철도와 국도는 도월리 마을을 아무렇게나 대하고 있기에 마을이 간직한 청정한 생태는 외지 인의 시야를 어둡게 한다. 선주민들의 의지와 무관한 다수 국민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진행된 소리 없는 다수결이 근거가 되어 진행된 독재로 말미암음이다.

고무장갑을 낀 손가락은 벌어진 틈만큼 둔해 손끝에 닿은 감각을 인지 못했고 스쳐간 의아심은 묵은 기억에서만 원인을 찾으려 했기에 버린 팩이 아까워 한심하다 못해 한탄했던 지난밤이 있었다. 깃든 생각에 잠시 머물며 신중하려 작정했지만 배인 습관은 언제나 새로운 단서를 예사로 흘리며 속도 올리기에 급하다.

성급한 일상의 편린도 편견으로 굳혀져 무지해진 시야를 바른 답으로 착각하기 일쑤이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건 아니라면 서도 낭패스럽고 부정적인 일들에 대해선 다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수결을 떠민다. 고무장갑 속 틈처럼 당장 와 닿지 않는 남의 일에는 더욱 그렇다.

승인한 적 없지만 누구의 허락도 요구하지 않았기에 쑥 꺼진 마을이 된 도청에도 가을정취가 한창이다. 낭만이 흐르는 제방 아래에도 굳혀진 편견 따윈 썰물 따라 흘러간 지 오래여서 티끌 만큼의 오해도 너끈히 희석시키는 마법의 하천만 유유하다.

겨울나기로 분주한 오리떼들의 회합 소리와 에너지 솟구치는 물고기의 첨벙거림도 잰걸음으로 밀어붙이는 냉한 바람이 야속하다며 편을 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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