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붓다께서 천하의 이치를 깨닫고 이렇게 외쳤다 한다. “이것이 어찌 가르쳐서 될 일인가!” 그렇다. 사색으로 꿈꾸고 독서로 다독이는 삶속에서 나에게도 내 몫만큼, 내 노력만큼의 깨달음 한두 개쯤은 움켜쥐고 산다. 퇴직을 하고 8년 동안 750평의 땅에 오직 삽과 괭이로 50여 작물을 길러보았다. 대상포진과 요로결석의 고통 속에서도 내 영혼은 수많은 촉수와 더듬이가 되어 지천의 들꽃들과 작물의 속삭임을 엿듣고 밀봉했다.

소두엄을 깔고 깊이 삽질을 반복하니 내 밭의 흙은 남들 밭의 세배에 가까운 30cm가넘는 표토가 형성되면서 물기를 머금고 미생물을 품어, 씨앗을 뿌려달라며 잉태를 갈구하는 건강한 자궁이 되어 나를 유혹하였다. 아내의 우려에도 맨손으로 흙을 만지는 나는 지구상의 적지 않은 민족이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농사를 지어보며 ‘땀과 인내의 소중함’을 배워 내 삶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선함과 정직함과 성실함만이 자연의 이치가 들어오는 통로가 됨도 알았다. “고추 모는 자빠지지는 않되, 움직이게 묶어라” 라는 이웃 밭 할머니의 충고에서 “움직임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꿈을 실현하는 힘이 있다”는 말도 이해했다.

그래서나는 농사를 지으며 70이 넘어서도 짱둥어를 쫓아 갯벌을 달려가는 소년을 꿈꾸고, 책갈피에 단풍잎을 곱게 모으는 소녀를 그려보며 산다.

경로우대의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국어국문학을 공부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앞에 성의(誠意), 정심(正心),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입신에 앞서 정성스럽고 올바른 마음으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는 소중한 뜻이 전제되어있음을 알았다. 학문의 참뜻이 시서(시경과서경) 육예(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배우는 학문(學文) 보다 스스로 묻고 배우며 깨우쳐가는 학문(學問)에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흥분했던가.

성인은 하늘의 뜻에 따라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깨우쳐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며 성리학의 길을 튼 주돈이가 9백년 하고도 훨씬 전에 설파한 내용을 60하고도 반이 넘어서야 겨우 무릎을 쳤다. 그 소중한 뜻만이라도 이해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한참 늦은 공부지만 감사했다. 그래서 나는 소중한 문장하나를 얻어 자양강장제로 삼으며 지적호기심을 스트레칭하며 산다.

“어떠한 명저나 텍스트도 열심히 배우려는 놈이 상상의 나래를 펴서, 질문하고, 채우고 해석을 더할 심연과 여백을 남겨두고 있다”라는 말이다. 내 생각을 조금 보태서 적어보았다.

칠순에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을 다녀왔다. 동행하는 한참 젊은 친구들의 “물을 충분이 마셔라”, “귀찮아도 옷을 자주 벗고 입어 체온을 유지해라”, “형님은 저희가 모시고 갈 터이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등 따뜻한 조언과 그 높던 아름다운 설산, 히말라야가 가르쳐 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훔쳐보며 나는 그저 뚜벅 뚜벅 걷고 올랐다. 이미 등정을 성공하고 하산하던 사십대 후반,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엄지를 치켜 올리고 우리를 위로하며 외쳤다. “불행 끝 행복 시작입니다” 불행과 행복사이를 구분 짓는 경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계는 어떤 의미일까?

강과 바다의 경계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대륙이 겹쳐지는 곳에서는 지혜가 모아지며 찬란한 문화가 꽃피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때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하면서도 생경함과 불편함 뒤에 뜻밖에 느껴지는 신비한 충일감을 경험하며 또 하나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고도가 3천m가 넘어서자 일반적인 수면과 식욕부진증세에다 체질에 따라 구토, 두통, 무력증 등 고산증 증세가 찾아왔다. 고산증은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체질의 문제였다. 동행한 의사는 비아그라가 아니라 타이레놀로 고통을 덜어 주곤 했다.

때론 인생이 그러하듯 이곳에서도 체질 때문에 불운과 행운이 갈렸다. 쉰둥이로 어릴 적 부모님과 같은 방을 쓰며, 간접흡연으로 기관지가 망가져 평소 산을 가까이한 습관 덕에다 고산증도 견딜 수 있다니! 나는 또 한 번 부모님의 은덕에 감사하며 ‘모시고 가겠다던 젊은 친구들’ 보다 한 두 시간 빨리 4180m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두려움과 우려로 실행을 미루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결심과 도전이 가져다주는 성취의 기쁨을 만끽했다. 나는 젊은 동행들을 기다리는 감미로운 안온함 속에서 또 하나의 꿈을 꾸고 있었다. 삼장법사를 모시고 온갖 잡귀를 물리치며 열사와 설산을 넘었던 손오공을 만나 근두운과 여의봉을 빌려 달라고 하자. 생명연장의 소중한 축복을 오직 무료로 보내는 대한민국의 노인들을 위해 ‘칠순에 여의봉을 탄 사나이’가 되어 좌충우돌 삶의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싶으니 신출귀몰한 그 재주까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보자.

저 눈부신 하늘에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낮에 보고 밤에 꿈꾸어온 이 많은 ‘새로움’, 아름다운 ‘다름’을 물감 삼아서 파워포인트를 멋지게 만들어 설명을 해보면 어떨까?

“내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활기차게 해석도 할 수 있다”는 말을 굳게 믿으며, A4용지 한 장의 ‘퇴고’가 가르쳐주는 첨삭과 반추의 묘미에 가슴 떨려도 하며 “참된 재미는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나 인식의 확장에 있다”는 말을 벗 삼아 또 한 번의 의미와 재미를 찾는 여정을 꿈꾸어본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