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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지역 민간인 학살자 가해자들 ‘경찰’사진을 통해 풀어보는 여순항쟁8
최인철 기자  |  hwakae72@gyci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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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26  10: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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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민간인 피해자 612명 가운데 2/3 학살

주령골 학살사건은 이후 곳곳에서 벌어진 참혹한 광양민간인 학살의 시작을 알리는 불운한 그림자였습니다.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른 후 이들 경찰이 선택한 것은 어이없게도 도주였습니다.

첫 전투에서 봉기군의 기세를 확인했던 경찰이 죄 없는 민간인을 광기에 어려 학살한 뒤 광양을 비운 것입니다. 그래서 몇되지 않았던 봉기군 일부가 21일 광양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10월 22일 봉기군의 주력이 광양에 들어온 뒤 광양은 봉기군의 치하에 온전하게 놓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봉기군은 진압을 위해 광양에 진군했던 15연대를 기습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봉기군은 광양군청을 비롯해 광양읍내 주요 건물을 장악하지만 봉기군의 해방구는 사실상 일일천하에 불과했을 뿐이었습니다. 15연대가 진압에 실패하자 정부는 다시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12연대를 투입해 진압해 나서는데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던 봉기군 대부분이 백운산 등지로 피신했기 때문에 15연 대와는 달리 비교적 큰 사상자 없이 광양을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2연대는 봉기군에 합류한 뒤 광양군청과 경찰서를 습격해 이곳을 경비 중이던 좌익세력 70여 명을 사살 하고 광양지역 내 좌익인사로 분류된 10여 명을 붙잡아 총살합니다.

그러나 보복은 이때부터였습니다. 주령골 민간인 학살사건을 잇는 피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지요. 진압군에 밀려 도주하던 봉기군의 퇴로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그 대상이 됐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여순 항쟁 발발조차 알지 못했던 그 지역의 토착민이었습니다.

피의 보복이 주로 발생한 지역은 짐작한 바대로 백운산 자락을 평생의 터전으로 삼아 둥지를 틀었던 옥룡과 봉강, 옥곡, 진상사람들이었습니다. 군경은 이들 지역에 봉기군들이 숨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 다는 이유를 들어 대대적인 색출작전을 수행했던 게지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10월 26일 발생한 진상면 어치마을 주민집단학살사건입니다. 봉기군과 봉기군의 협력자를 색출 한 다는 것이었지만 대부분 정확한 사실 확인 없이 누군가의 지목하거나 의심된다는 이유로 학살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항쟁의 시발이었던 여수가 탈환된 27일 공식적인 진압성공을 발표하지만 사실 그 이후 여수와 순천, 광양을 비롯한 동부지역 주민들은 더 큰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특히 봉기군이 입산해 유격전으로 들어갔던 광양과 구례는 피해가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었지요. 1차 빨치산(파르티 잔)으로 불리던 봉기군들은 비록 도주했을지언정 전투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밤을 이용해 유격전을 전개했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1949 년 9월 16일 새벽 발생한 광양읍 내 기습 공격이었습니다.

당시 빨치산 150여 명 규모의 부대가 야음을 틈타 광양읍내로 진군, 광양경찰서를 비롯한 주요 관공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광양경찰서등 주요 건물이 불에 타고 경찰과 군인 등 29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요. 짐작한 바대로 그날 새벽 빨치산의 공격으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광양 경찰은 또 다시 광양읍과 백운산 일대 면단위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 행합니다.

하물며 빨치산의 위협에 쌀과 옷가지 등을 빼앗긴 주민들에게까지 빨치산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어 거리낌 없이 총구를 들이대고 죽였으니 당시 주민 들이 느꼈을 공포를 어떻게 짐작이나 할수 있는 일이겠는지요.


아아!! 이름 없는 청춘들 붉게 죽은 곳주령골아 검단재야 솔티재야 반송재야


순박했던 주민들은 그렇게 빨치산 협력자로 몰려 광양읍 구산리 우두마을에서, 덕례리 반송재에서, 사곡리 솔티재에서 세풍리 검단재에서, 서면 구랑실재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여순항쟁의 여파는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좌익혐의자로 몰려 관리 되거나 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한국전쟁 발발소식이 전해지자 이들을 집단학살한 보도연맹사건까지 항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우리지역을 짓누르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여순항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광양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자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도 모두 612명에 이릅니다.

빨치산 학살피해자도 일부 있었으나 대부분은 경찰에 의한 것이었는데요, 광양읍 134명, 봉강면 51명, 옥룡면 88명, 옥곡면 62명, 진상면 81명, 진월면 50명, 다압면 91명, 골약면 55명 등이지요.

아마도 여순항쟁 특별법에 따라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면 그 피해규모는 더 커지겠지요.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성피해 자가 20%에 달하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광양지역은 대부분 남자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남성학살자 수가 575명을 94% 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데요, 백운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과 군경의 전투과정에서 남성들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 따르면 광양지역의 민간인 희생자는 대부분 여순항쟁과 한국전쟁 당시 군경이 일시적 후퇴를 했다가 수복하는 과정에 빚어진 보복행위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연령별 비중은 20대가 40.9% 로 가장 많았고 30대 20.8%, 40대 13.3% 순이었고요, 10대 피해도 10.7%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직업은 농업이 74%를 차지해 피해자 대부분이 농민이었습니다.

이렇게 광양지역에서 민간인 학살피해자 규모가 컸던 이유는 백운산을 비롯해 험산이 집중돼 있고 여순항쟁의 잔존세력(구 빨치산)과 한국전쟁기의 인민군 잔존 병력, 남로당 및 좌익세력들의 거점이라는 지정학적 원인이 지목됩니다.

또 빨치산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군경의 무리한 동조세력을 색출하는 과정 에서 피해자가 다수 발생했다는 것이 과거사위의 분석인데요, 빨치산과 접촉하는 이른 바 ‘라인’을 찾아내 사법절차 없이 즉결처분 행위가 빈번했다는 사실이 밝혀 졌지요.

그리고 일부 빨치산에 의한 학살도 발생했으나 경찰에 의한 학살이 전체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경찰의 보복행위가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반면 다른 지역과는 달리 빨치산이나 인민군의 경우에는 민간인 피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는데요, 좌익 동조세력의 보복행위로 인한 민간인 피해도 미미한 수준이어서 광양지역 민간인학살피해자의 주요 가해세력은 다름 아닌 경찰이었음을 역시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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