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밝혀진 희생자는 612명…그러나 그들뿐일까
진상조사와 규명, 피해자와 유족의 한 풀어줘야

여순항쟁으로 인한 피해는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제주항쟁에 비할 수는 없으나 민간인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만행이 고스란히 담긴 상징적인 사건인데다가 한국전쟁 전후에 이르기까지 그 피해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보면 결코 해방 전후 한국현대사와 당시 정권을 규정지을만한 사건이었음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1차 빨치산과 한국전쟁 이후 2차 빨치산 활동으로 인해 광양과 구례 등 전남북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주민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고 학살과 핍박의 세월이었던 게지요. 흔히 당시를 경험한 자나 목격자에 따르면 “낮에는 군경의 치하에서, 그리고 밤이면 빨치산의 세상”에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자들에게 폭력과 학살은 잔인하게 모습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무심도 하게 흘러 당시를 겪었던 이들 대부분은 이미 한 많은 세월을 가슴에 품고 다시금 흙으로 돌아갔으니 이제 당시를 증언할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은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다만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지금까지 광양지역 여순항쟁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광양지역 민간인 피해자는 총 612명입니다.

물론 피해자와 유족의 피해신고로 이루어진, 다소 수동적인 조사인데다 정확한 진상규명과 조사가 미진했음을 감안하면 민간인 학살이나 피해사례는 이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밝혀진 규모만 보더라도 그 피해가 결코 미약하다고 볼 수 없는 엄청난 규모임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요.

오늘은 지금까지 밝혀진 광양지역 민간인 학살지를 중심으로 당시의 뼈아픈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앞서 밝힌 바 있으나 여순항쟁 최초의 민간인 학살지는 바로 순천과 광양의 경계를 이루었던 ‘주령골 학살사건’입니다.

△주령골 : 현재 광양읍 덕례리 동주마을 뒤편으로 추정되는 주령골은 달리 반송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10월 20일 봉기군에서 패한 광양경찰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하루 뒤인 21일 좌익혐의로 경찰서에 갇혀있던 27명을 그곳으로 끌고 가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입니다. 재판도 없이 형장도 아닌 곳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곳입니다. 뿐 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16일 이틀 전 빨치산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좌익동조혐의로 끌려온 40명이 또 다시 집단학살된 비극의 장소이지요.

△솔티재 : 광양읍과 골약면의 경계를 이루었던 곳으로, 현재는 남해고속도로가 개설되면서 당시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곳입니다. 1948년 10월 22일 마산주둔 제15연대가 토벌을 위해 광양을 향하다가 봉기군의 기습을 받아 연대장인 최남근이 생포되기도 했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 이곳에선 같은 해 11월 11일 정확한 인원을 알 수 없으나 봉강면 지곡리 주민 다수가 학살됐고, 1949년 9월 21일에는 옥곡면 주민 30여 명이 끌려와 이곳에서 집단학살 됐지요.

△검단재 : 광양읍 세풍리 뒷산으로 1951년 1월 16일 역시 이틀 전 빨치산의 광양읍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광양경찰서에 갇혀 있던 50여 명이 경찰에 의해 집단 학살된 장소입니다. 옥룡면 운평리에 살던 마을이장 성용수 등 면직원과 직원, 이장 등이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류로 광양경찰서에 유치됐는데 이들이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덧씌워 잔인하게 총살됐지요. 물론 혐의에 대한 사실확인이나 재판 없이 자행된 경찰의 만행이었습니다.

△초남리 봉화산 : 일제시대 이후 금광산업 성행했던 곳으로 여순항쟁 이후 빨치산과 군경의 전투가 빈번했던 지역입니다. 이 가운데 멍구모텡이라고 불리는 곳은 초남마을과 현월마을 가운데 있는 곳으로 지세가 험해 특히 전투가 자주 일어났던 지역이지요. 이곳에선 다른 지역에서 군경에서 잡혀온 다수의 사람들이 학살됐던 곳입니다. 1949년 9월 16일 빨치산 공격을 받던 군경이 현월마을, 인근 죽림리 쌍두, 백동, 임기마을 민간인들의 피해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구 광양읍사무소 : 현재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광양읍사무소는 당시 빨치산의 주요 공격 대상기관이었습니다. 1949년 9월 6일 빨치산 공격 시 이 광양읍사무소 공터에서 광양주민 수십여 명이 연행됐다가 쇠머리(우두마을)라고 불리는 구산리 정자나무 아래에서 집단학살 당했습니다.

△봉강면 구서다리 : 봉강면은 여순항쟁과 한국전쟁을 전후해 면소재지 전체에 목책 울타리를 치고 빨치산을 방어했지요. 군경은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봉강지서 뒤편에서 부역혐의자를 색출해 처형하기도 했는데요, 눈에 띠는 것은 봉강면 구서리 구서다리입니다. 봉강면소재지 봉당리 인근인 이곳은 1949년 12월 29일 빨치산이 봉강지서를 공격하면서 당시 도망가던 주민 9명을 붙잡아 학살한 곳입니다. 빨치산은 총뿐 아니라 돌로 내리쳐 이들을 죽였다고 하니 그 만행 역시 군경과 다르지 않았음이 드러나는 대목이지요.

△봉강면 신촌마을 ; 광양학생의 집, 그러니까 지금은 햇살촌 인근지역입니다. 백운산과 가까웠던 이곳은 당시 빨치산이 자주 내려와 식량 등 생필품을 수탈해 갔지요. 이곳에선 정확한 일시는 확인할 수 없으나 모월 모일 빨치산 몇몇이 식량을 구하려 내려왔다가 주민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경찰을 목격하고 경찰을 죽이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날 오후 당시 야경을 섰던 마을사람 7명을 학살했습니다.

△가모가재 : 옥룡면과 봉강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입니다. 1949년 9월 16일 빨치산 광양읍 공격 당시 군경이 빨치산 협력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같은 해 9월 23일부터 30일까지 주민 30여 명을 이곳에서 모두 4차례에 걸쳐 집단학살했습니다. 또한 광양읍과 봉강면의 경계에 있는 쇠머리(우두마을)에서도 같은 이유로 좌익혐의자로 체포되었던 민간인들을 학살하기도 했지요.

△옥룡면 산남리 : 1949년 남정마을, 이곳에서는 빨치산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그해 겨울이었는데 마을 청년들이 밤에 모여 있다가 빨치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빨치산은 경찰로 위장해 이들에게 접근했다가 협조적으로 나오자 잔인하게 사살한 것으로 전해옵니다. 또 산본마을에선 국회의원에 출마한데다 청년단장을 맡을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던 김준기가 교회연설에서 빨치산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인근 야산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옥곡면 묵백리 : 옥곡면 백암마을과 삼존마을, 점터마을은 해방이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옥곡면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아픔을 간직한 곳입니다. 1948년 백암마을 출신 의사였던 정옥기가 반란군으로 오인을 받아 군경에 의해 순천도립병원 인근에서 학살됐고 1949년 4월 21일, 1949년 9월 21일, 1950년 7월 이곳 묵백리 주민들은 좌익협조자로 몰려 광양읍 솔티재나 순천시 서면 구랑실재에서 학살을 당했습니다. 이밖에 옥곡면에서는 수평리 주민들도 빨치산의 짐을 날랐다는 이유 등으로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다압면 염창마을 : 백운산 4대계곡 가운데 가장 맑은 물은 자랑하는 금천리는 백운산 능선 중심의 산악지역이지요. 그런 까닭에 당시 빨치산의 주요 배후마을일 수밖에 없었는데요, 한국전쟁 당시 광양군 인민위원장과 다압면 인민위원장을 지낸 김을수와 김갑수가 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여순항쟁 당시 봉기군이 산으로 숨어들자 하동군 화개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제12연대 군인들이 자주 염창마을 수색했습니다. 반군소탕작전이라고 불리는 수색을 이유로 마을주민들을 회관 앞에 모아 놓고 부역자라는 딱지를 붙여 집단학살했던 곳이었지요.

이밖에 진상면 느재마을에선 7명이 군경에, 장성뱅이에서 가족이 청년단장을 했다는 이유로 3명이 빨치산에게 학살을 당했고 진월지서에는 좌익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사평마을 주민이 총살을 당했고 오사리에서도, 신구리에서도, 다압면 다압지서에서도, 고사리 국군주둔지에서 신원리에서도, 골약면과 골약지서에서도, 통사마을에서도 죄 없는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여순항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렇듯 우리지역 수많은 민간인들이 일부 빨치산에 의한 피해사례도 있었으나 오히려 보호받아야할 군경에 대부분 학살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반백년이 훌쩍 지나 70년이 되는 지금도 그 억울한 죽음은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 오랜 시간동안 죽임을 당한 이들 민간인 희생자들은 여전히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겠지요. 제대로 된 진상조사를 통해 당시를 규명하고 민간인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국가차원의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 연유에라야 비로소 해원과 상생을 말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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