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 김동혁 선생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농사꾼의 장남에게 흐르는 피는 결국 땅을 향해 흐르게 되는 모양입니다. 새벽길을 나서는 아버지의 쓸쓸함과 무거움의 무게를 이미 알아버린 탓이겠지요. 그리고 고향땅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은 그를 광양이 낳은 대표적인 농민운동가라는 수식어를 달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 차려낸 사진은 백운산 농장을 일구던 서정 김동혁 선생의 모습입니다. 뒤편에 보이는 헐벗은 산야가 거칠고 모질었던 그의 일생을 말해주는 듯 하는 데요, 선생의 한 평생은 이처럼 헐벗고 가난한 농촌과 농민들의 삶에 대한 고민이었고 개척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1918년 선생은 광양읍 목성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처음 세상과 마주하였지요. 가난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그의 발목을 잡아 내리는 족쇄였던 모양입니다. 결국 1931년 광양공립보통학교(현 광양서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난으로 인해 진학의 꿈을 접은 선생은 태어나 빈 곡간의 자식에게 전해오는 고통스럽고 쓸쓸한 좌절을 처음 맛보았을 것입니다.

결국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를 도와 희망이라고는 좀체 잡히지 않을 것만 같았던 농사를 짓게 됩니다. 그러다가 일자리를 찾아간 곳이 광양읍 초남리,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양광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착취를 일삼는 일본인 업주에게 대항해 임금쟁의에 가담했다가 해고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18살의 청춘이었지요. 이곳 광양광산에서의 아픈 기억은 이후 선생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해고된 뒤 농촌지도원 합격에 농촌지도원으로 활동하다가 선생의 일생을 결정할 소중하고 오래도록 묵어갈 인연이었던 스승 백남규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백남규 선생은 일본 동경에서 2.28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회 총무였고 농민자녀들의 교육도장이었던 응세농도학원을 운영하고 있었지요.

스승을 만난 서정 선생은 결국 스승이 운영하는 응세농도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1939년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일본농가의 영농비법을 배우다 산지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니 그 같은 절감의 산물이 바로 백운산 농장으로 이어졌다 할 수 있겠습니다.

선생이 고향 광양으로 돌아온 것은 조국이 해방된 이태가 지난 1947년의 일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고향 땅을 일구어 희창농장을 개척하고 있었는데 당시 광양군청의 부탁을 받고 1948년 광양군농예생산가공조합을 창립해 본격적으로 고향농업 발전에 대한 꿈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광양원예농협 모태가 이 가공조합에서 비롯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열악한 행정조직과 예산,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선생의 뜻은 일단 고개가 꺾였지만 선생은 이를 오히려 왕성한 농민운동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1954년 여천군 돌산에서 도서농업연구소를 차리고 월동채소농법을 연구해 마침내 5년 뒤인 1959년 그 재배법을 완성해 농가에 전파하는 등 단 한번도 농촌문제를 외면한 삶을 살지 않았지요.

또한 농촌계몽운동에도 적극 나서게 되는데 선생은 강연과 4-H조직 보급 및 활동을 열정적으로 전개합니다.

1961년 광주에 새농민신문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했다가 박정희가 벌인 5.16쿠데타로 폐간의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이후 그는 다시 고향 땅, 광양에 내려와 광양농업의 발전을 위해 헌신키로 일생을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백운산 협업개척농장이 탄생했지요.

1961년 탄생한 백운산농장을 통해 선생은 자신도 살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도 살리는 농장을 꿈꾸었습니다. 광양농민들이 지닌 근면한 노동력과 자신의 지식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건강한 농업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꿈 말입니다.

농장 안에는 농민학교와 보육소가 마련됐고 장기적으로는 초중학교 과정은 물론 직업교육 과정도 유치할 계획을 세웠는데 백운산 농장의 생활상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선생을 ‘산지농업의 선구자’라 불렀고 그곳 사람들을 ‘산의 기적을 이룩한 사람들’로 부르며 전국적인 관심을 표명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빠르게도 찾아왔습니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바뀌는 농업정책으로 그를 주목하던 정부가 하루아침에 지원금을 끊어버린 것이지요. 지원금이 끊기자 가축의 사료조차 마련할 길이 막막했고 결국 사채에 손을 댔고 단기사업 위주로 운영의 틀을 바꾸면서 조직의 중추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결국 1970년 232ha의 산비탈에 황금농장을 만들겠다는 포부는 10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선생의 농장은 현재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백운산 수련원으로 탈바꿈했으니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농업을 위한 선생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지요. 1987년 선생이 펴낸 <소파동 백서>는 당대 정부의 잘못된 축산정책으로 고통 받는 농민들을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선생은 1999년 10월 불의의 교통사라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오직 광양농업과 한국농업의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그런 선생의 삶을 김대중 정부는 “한 평생을 농업과 농촌을 위해 살아온 농민운동의 선구자이며, 개척자다. 농업발전의 터전을 마련한 상록수”라고 평가했지요.

“가난하고 못 배운 농민을 없애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광양의 물론 한국의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선생. 어떠한지요. 농민들의 삶이 평안키를 바라던 선생의 꿈은 지금 현실이 되고 있을 것인지 자꾸 묻고 싶어집니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