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문학 작가들이 전하는 광양이야기

▲ 복향옥 까치문학 작가

읍내에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또 산타가 다녀갔나 보다. 하얀 양파 한 망과 자색양파 반 망이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사이좋게 현관문을 지키고 있다. 가게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잔디를 깎고 들어오는 남편에게 물으니 지나가는 사람을 본 적도 없단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어도, 그 사람이 인사를 했었어도 기계소리에 막혀 아무 것도 듣지 못했으리라.

우리 집 앞을 지나서 농사짓는 분이 몇 분 안 되기 때문에 누가 다녀갔는지 추측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에는 양파 밭이 없는 까닭에, 어쩌면 한참 떨어진 마을에서부터 일부러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이번에는 고마운 마음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지는 것이다.

도대체 누굴까, 며칠 전에 거름 실은 경운기를 지나가게 해줬다고 내가 민망하도록 고마워하시던 진수할아버지가 갖다 놨을까? 아니면 민박손님 연결해 준 것 때문에 성훈이네가 가져온 걸까, 그도 아니면 손녀딸들과 함께 드시라고 삼겹살이랑 과자 사드렸더니 그걸 또 그냥 받지 못하시는 가영이 할머니가 그러셨을까... 퍼즐놀이 하듯 이 사람, 저 사람 떠올리다가 전화기를 든다. 아무래도 진수할아버지일 가능성이 많아 전화로 확인하려다 그만두기로 한다. 만약 아니면 그분이 더 민망할 것이므로.

결국 사흘이 지나 걸려온 전화 한 통에 궁금증이 풀렸다. 진수 할머니였다. “양파 드셨능가요? 진수 할아버지 그 밭에 가는 길에 보냈구마요. 아이고... 누가 준지 몰러서 안 드신 건 아닝가? 아니믄 또 여기저기 퍼준 거 아녀? 우리가 농사지은 겅 께 남 퍼주지 말고 드시오 이?”

내가 사는 하조마을은 늘 이런 식이다. 아침에 눈 떠 보면 어느 날은 호박 몇 덩이가 놓여있고, 어느 날엔 커다란 비닐봉지에 감자가 한가득 담겨있기도 한다. 손맛 좋기로 소문난 가영이 할머니는 새 김치를 담글라치면 꼭 나를 부르신다. 적에 담그면 작은 통에 꾹꾹 눌러 담아주시고 많이 담그신 날에는 큰 통에다 꾹꾹 눌러 담아주신다. 연세가 80이 넘었어도 언제나 소녀처럼 웃으시는 이쁜할머니(우리 자매들 사이에서 부르는 명칭)는 어느 해 봄날, 차창만 열고 인사하는 나를 불러 세우시고는 무조건 따라오라 하시더니 냇물 건너 당신 밭으로 이끄셨다. 밭 한 귀퉁이에 있는 호미를 들고는 봉긋하게 솟은 흙무덤 하나를 허무니 그 속에서 하얀 무들이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무들을 보물 다루듯 하나하나 흙을 털어 옆에다 쌓아놓더니 “이거 파서 다 가져가, 잉? 여름 내내 식당에서도 먹을 수 있을 꺼구만. 솔찬히 많어. 다 가져가.”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손수 가꾸신 농산물을 혹은 정성 가득 담은 반찬들을 내 주시는 그분들에게 나는 또 무슨 이유를 달아서라도 보답을 한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 손발이 다 갈라지고 터지도록 애써 지은 농산물을 거저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답인 티를 내서는 안 된다.

“내 맴을 왜 돈으로 따지고 그랴~ 섭섭허게... 내가 농사 지응 겅 께, 그자 주고잡아서 주는 걸 이렇게 따박따박 갚으믄 이게 무슨 정이랴~ ”

언젠가, 딴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에 버럭 화를 내시던 가영이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난 후로는 일부러 산 물건도 어쩌다 생긴 걸 많아서 나누는 것처럼 말한다.

광양으로 이사 오기 전에도 그랬다. 귀촌을 망설이는 우리에게 큰언니는 목에 힘주어 자랑을 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동네 분들이 가져다놓는 온갖 농산물에 늘 꿈꾸듯 행복하다고. 마을 어르신들은 마치 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 먹거리를 늘 나누어 주시던 친정엄마 같다고.

제사를 지낸 새벽에는 동이 트기도 전에 언니들과 나를 흔들어 깨우시던 친정엄마. 잠도 채 털어내지 못한 우리들에게 보따리들을 들려서 너는 저 집으로 가거라, 너는 이 집에 갖다 주거라, 그 댁들 조반 드시기 전에 얼른 가거라 이르시던 친정엄마가 생각난다. 그런 엄마가 가끔은 야속했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묵묵히 새벽이슬 밟으며 심부름 하던 시절, 당산나무 아래를 지나야하는 게 두려워 망설이기도 했지만 한 번도 엄마의 심부름을 거스른 적이 없던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그 때 엄마가 베푼 정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으로 흐르는구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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