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80여 호쯤 되는 어릴 적 우리 마을에도 부잣집이라는 별칭이 붙여진 한두 집을 제외하고는 보릿고개를 경험하며 살았다. 산나물을 캐고, 이삭을 줍고, 한 끼 정도는 고구마로 때우고, 구황식품이 밥상을 채워주었다. 그런데 왜 모처럼 벗들과 추억을 회상하며 나누는 이야기 속에는 가슴이 아려오는 아쉬움보다는 기억할 수 있기에 고맙고 소중한 기쁜 이야기들로 웃음꽃을 피울까?

고추가 곱게 말라가는 마당 우물가 감나무에는 남겨둔 까치밥이 나눔을 이야기하고, 대보름날 약밥을 얻으려 집집마다 몰려다닌 동구길 벗들에게는 항시 눈만 뜨면 붙어산다는 즐거움 속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이 차고 흘렀다.

거울보다 먼저 나의 얼굴을 친구의 얼굴을 통해 봤다. 그가 배가 고파하면 나도 배가 고팠다. 정초 복을 불러오고 병마를 쫓는다는 농악대를 뒤따르며 우리는 예쁜 순희 손도 은근슬쩍 같이 잡았다. 배고픔도 잊고 학교파한 오후엔 온 마을을 돌며 굴렁쇠를 굴리고, 여치와 메뚜기를 잡고, 도토리를 주우며 들판과 뒷산을 헤매고 다였다.

정으로 한을 감싼 우리들의 추억 속에는 현실보다 아름다운 서사가 있었고 배 고품 보다 선명한 아름다운 풍광이 어느 곳에나 열리고 익어갔다.

“논 밥 먹고 싶어 마당가에서 밥 먹는다”는 말이 기억난다. 내 어릴 적 잊혀 지지 않는 추억중 하나는 마을사람들이 품앗이로 돌아가며 모를 심고 사이좋게 둘러앉아 못밥을 나누어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품앗이와 못밥’에는 우리가 잊어버린 조상들의 숭고한 정신이 담겨 있다.

품앗이 에는 모를 심는 재주차이는 서로 알고 있어도 처우나 노임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도와줄 수 있다는 보람과 자부심 정도, 조금 못하는 사람은 고마워 할 줄 아는 착한마음 외에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도 차별받지도 않았다.

잘하고 못하는 차이보다 더불어 이웃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서로 고맙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 뒤에 둘러않아 먹는 못밥은 그래서 더욱 꿀맛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속에 왜 애환이야 없었겠는가. 그들이 일의 능률을 높이고 고됨을 잊기 위해 일과 같이했던 노동요(勞動謠) 속에서 그 서러우나 아름다운 흔적 몇 가지를 찾아보자.

배는 고파 등에 붙고 목도 말라 못 하겠네
아이고 답답 내 신세야 농사백성이 웬 말인고
남 날 적에 나도 나고 나 날 적에 남 났는데
이내 팔자 무신 죄로 농사 백성이 되었는고

이 노래는 경북지역에서 나무하며 부른 노래이다. 농부로 태어난 아쉬움과 고달픈 일상을 신세타령 하면서도 내 운명을 탓하지 남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가족들의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재미삼아 찾아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며 부른 노래도 있었다.

진담뱃대 쌈지는 우리할부지 노리개
우루룽 부루룽 물래질 우리할매 노리개
우리아부지 노리개 지개목발이 노리개
우리엄마 노리개 살림살이가 노리개

이 노래는 경남 밀양지역에서 모심을 논을 밟아 고르며 부른 노래라 한다. 그때는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은 모르고 살았을 것 같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살았던가. 일과 놀이의 경계가 없듯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도 같다.

이유야 어떻든 극도의 방황과 괴로움, 울분까지도 ‘신 내림’으로 돌파구를 찾고 구원받는 동물적, 존재론적 지혜가 그들의 몸에는 심어져있었다.

고됨을 잊고 웃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노동요만큼은 남녀사이의 연가가 유교 도덕을 넘어 비교적 크게 허용되었다. 다음노래는 경북영양 지역에서 채록된 노래의 일부이다. 모내기 때 부른 노래여서 비교적 넓게 애창되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모시아적삼 시적삼에 분통같은 저젖바라
많이보면 병난다네 살금살금 보고가자
유자야탱주는 의가좋아 한꼭지에 둘이여네
처자총각은 의가좋아 한벼게에 잠이드네

농주를 마셔 흥도 나고, 여느 때보다 허벅지노출도 심하고, 건강한 선남선녀들의 뛰는 가슴은 긴 농사철을 견디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어릴 적 동•서천은 그렇게 깨끗하고 하얀 바위와 크고 작은 돌들 사이로 맑은 물이 적당한 깊이로 흘렀다. 바위와 돌들에는 다슬기가 새까맣게 붙고, 숨기 좋은 돌 틈 사이는 참게새끼, 징거미 새우, 메기와 빠가사리, 미꾸라지 와 기름쟁이 등 수많은 물고기들이 맨손으로도 제법 잡혔다. 초남 앞바다는 재첩 반 모래 반 이었고, 오고가는 논둑길에는 풀게가 발에 차였다.

비가 오면 영롱한 무지개가 이산저산에 다리를 놓고 꽃 없는 겨울에는 하얀 눈꽃이 대신 피어주었다. 들판이 노랗게 물들면 도구친 논도랑에는 토실하게 살이 오른 미꾸라지가 뻘속에 숨어있었고 솜씨 좋은 어머니가 끓인 추어탕 맛을 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가장 사랑하는 손주 녀석에게 가장 소중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모든 것이 너무 변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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