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나는 5남매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손위로 두 분의형님과 누나, 네 분이 있어서 고생은 안 해보고 많은 사랑만 받고 어린 날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부터 한 분 한분 세상을 떠나 보내야하는 ‘죽음’과‘주검’을 상면 할 때마다, 나는 받은 사랑만큼 슬픔을 눈물로 켜켜이 토해 내야만했다.

작은형이 떠난 날, 영안실을 지키며 이제 둘만 남은 작은누나와 나는 손을 잡고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5남매가 같이한 호흡을, 체온을, 눈빛을, 삶의 흔적을 이야기하며 밤을 보냈다. 여수•순천 사건과 한국전쟁을 연이어 겪은 우리지역에도 이 땅에 묻히고 세월에 씻겨 나갔지만 가정마다 전쟁의 상흔 하나쯤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 있을 것이다. 우리5남매 에게도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이야기 하나가 있다.

우리 집은 읍내의 북쪽 내우정 마을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날은 출가한 큰누나가 근친(覲親)을 온 날이었다. 울목에는 누나가 가지고온 떡 한 석작과 답례로 가져갈 떡을 만들기 위해 준비한 찹쌀 반말이 놓여있었다.

큰형은 당시 앞으로 군대 가는 것을 피할 수도 있다는 누군가의 조언으로 어린나이에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었다한다. 농번기라 아버지일도 거들고 누이도 볼 겸 그 날 밤 그 방에는 큰형님도 함께하고 있었다. 모처럼 모두모여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을 즈음, 어디선가 개짓는 소리가 들렸고, 방문 앞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를 낮춘 남자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을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작은누나는 본능적으로 벽에 걸린 오빠의 경찰복을 재빨리 내려 이불속으로 집어넣었다. 조용히 하라는 경고의 말과 들어오는 공비의 뒤쪽 방문 위에 아직도 걸려있는 오빠의 경찰 모자가 작은누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의 같은 시간이었다.

순간 작은누나는 오빠를 살리는 길은 공비들이 오빠의 경찰 모자를 보지 못하고 빨리 방에서 나가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고의로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공비는 작은누나를 발로 걷어차며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죽인다고 겁박했다. 그 순간 공비의 눈에는 뜻밖의 매력적인 떡과 찹쌀이 눈에 들어왔다.

신호를 받은 두 사람이 떡과 찹쌀을 들고나가자, 밖에서 우두머리로 느껴지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무 이곳은 경찰서와 너무 가까워 위험하니 빨리 나오기요.” 방을 나가려던 공비의 눈이 큰형님의 손에 멈추었다. 공비는 형님 손을 만져보며 농사꾼손이 아닌 것 같다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밖으로부터 다시 독촉을 받은 공비는 의심쩍은 눈초리를 남기고 마침내 방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온 가족은 비로소 가슴을 쓰러 내렸다. 기적은 우연이나 요행이 아니었다. 큰형님이 아버지를 위해 농사일을 애써 거들며 손이 조금이나마 거칠어지지 않았다면, 작은누나의 자기의 안전보다 큰형을 생각하는 마음과 순발력 있는 행동이 없었다면, 떡과 찹쌀이라는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노획물이 없었다면, 우리는 형님을 잃은 슬픔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당시 나는 큰누나의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한다. 이 이야기는 형님 누나들에게서 주워 모은 이야기이다. 때론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과거를 향해 건너뛴다. 이 사건이 있은 뒤 나의기억에 읍의 중심부를 대나무로 울타리를 친 모습과, 우리 집에는 마을장정들이 보초를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을 분들이 돌아가며 밤참을 해 나르자, 내 딴 인내를 발휘하며 몰려오는 잠을 참고 밤참의 한자리를 차지한 기억도 난다. 우리 집처럼 행운이 다 따라 주지는 안았다. 봉강의 백운저수지가 만들어지기 한참 전, 나는 쇠머리를 거처 지금은 저수지 바닥으로 변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신작로를 걸어서 지금 면사무소 부근 상봉마을에 사는 큰누나 집에 놀러가곤 했다.

하루는 지서의 마이크에서 공비를 많이 체포하여 호송해 온다는 안내방송이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군용트럭에 전선줄로 굴비처럼 묶인 남녀들이 도착했다. 할머니들이 담배대로 체념과 공포로 초점 잃은 눈의 그들을 찔러대며 “너 이 연놈들 때문에 생때같은 내 자식이 죽었다”며 절규하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옥룡면사무소가 낮에는 국기를, 밤에는 인공기를 거는 진풍경이 반복되는 시기도 있었다한다. 경찰들은 밤이면 조용히 숨어들어 마을 방에 모여 길쌈을 하며 주고받는 여자분들 이야기 속에서 정보를 얻고, 반란군들은 동조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들로 검증 없이 너무도 쉽게 내편과 적 편으로 이등분했다.

무언가도 모르는 이념 때문에 옥룡남정마을 등 많은 마을의 죄 없는 사람들이 서로의 적에 공조(共助)나 부역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희생되며 한마을에 많게는 열 명 이상 제삿날이 같은 비극을 안겨주었다. 방이 추워 군불을 좀 넣었는데 군에 신호를 보냈다하여 모진구타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외진 마을은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이사를 강요받았고, 소들은 밤에는 경찰지서부근으로 옮겨 매어졌다. 경찰을 했던 형님 말에 의하면 억울한 사람인 것 같아 호송을 하며 도망갈 기회를 수차 주어도 꾸벅꾸벅 따라오는 순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적인 감정 때문에 같이 살아온 이웃을 사지로 몰아넣는 나뿐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 그 난리 중에서도 한때 우리지역에 주둔하던 ‘나를 따르라’부대 군인들과 이 땅의 처녀들의 로맨스도 있었을 것이다. 상처는 빨리 아물어야 하지만 아픔에서 배움 것만큼은 오래 기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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