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서 용강 중학교 3학년

▲ 김민서 (용강 중학교 3학년)

대개 내가 살면서 선택한 순간들의 결과는 극명한 두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렇다, 아니다와 찬성, 반대 등이 그 예이다. 어떠한 두 집단의 비율이 동등하다면 토론 등의 방식으로 결과를 이끌어내겠지만 그 비율이 확실히 차이가 날 정도로 어느 한 입장을 대변하는 인원이 많다면 우린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선택한 쪽을 존중해 준다. 이후 그 결과에 따른 이의제기는 불만이 있어도 당연한 듯 수긍한다. 많은 사람이 선택한 일이기에 소수가 희생당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써 은연중에 모두가 동의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소수의 의견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

기타무라 료코의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책에서 선로 전환기 근처에 폭주하는 광석차가 있는데 멈추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로 나온다. 다만 선로 전환기를 조작하면 광석차가 진행방향을 바꿀 수는 있다. 광석차가 향하는 A선로에는 5명의 인부가 있고 진행방향을 바꾸면 B선로에 있는 1명의 인부가 죽게 된다. 이때 사람들은 선로 전환기를 조작할까 그대로 내버려둘까 라는 부분에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광석차가 향하는 곳은 곧 죽음을 뜻한다. 몇 명이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5명의 죽음과 1명의 죽음에서 그나마 5명이 죽는 것 보다 1명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광석차가 향하는 방향은 원래부터 5명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더 많다는 이유로 내가 선로를 전환한다면, 1명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굳이 광석차의 방향을 움직여 내가 1명을 죽였다는 건 큰 고통과 죄스러움이 되어 스스로를 덮칠 것이다. 하지만 그냥 그대로 놔둔다면 어쩔 수 없었고 운명을 바꾸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음의 짐을 덜 수는 있겠지만 5명이 죽는 걸 그대로 보고 있었다는 자책감이 날 괴롭힐 것이다. 마음은 선로를 전환하지 않는 쪽이지만 막상 그 상황을 보게 된다면 선로를 전환하여서 5명을 살릴 것 같다.

이것은 공리의 원칙과 관련이 있다. 공리의 원칙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 5명의 생존은 곧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뜻한다. 사실 우리 사회엔 공리의 원칙이 만연해 있는데 그 흔한 예시가 다수결의 원칙이다. 오늘날의 민주사회는 여론 조사나 투표를 통해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을 우선이지만 최고의 가치로 향하게 만드는 종착역인 뿌리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이념이나 정치사상이 그 배경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포함한 이탈리아, 일본은 전체주의를 실시했다. 모든 전체주의 국가들이 생각하는 이상사회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선전해서 세뇌를 시킨다. 국가를 위해 국민의 희생과 봉사, 복종을 강요하는 결과가 당연한 듯 한결같이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통제 속에 처한 국민들은 그것을 당연한 현실로 인지하게 된다. 개인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게 될 경우 그것은 나아가 다수의 국민성을 약탈하게 되면 얼마든지 전체주의로 빠지기 때문에 그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내 의지와는 다르게 다수가 선택한 집단과 입장을 따른 적이 몇 번 있다. 다수가 주는 안정감 때문에 혼자만 달라서 틀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편안한 감정, 내 입장이 무시당하거나 의견이 묵살당하지 않겠다는 달콤한 기대 때문에 다수로 기운 적이 있었다. 소수의 입장에서 다수를 이긴 적은 없었다. 보편적으로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아닌 개인의 취향차이에서는 무조건 다수의 입장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으며 스스로 다수의 편에 속할 것이기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이 마냥 옳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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