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조사 심포지엄…사료집 발간 후 관광 자원화 제안

나라가 위태로울 때 광양지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이 혁혁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19일 광양문화원 주관으로 열린 ‘광양현감 어영담 사료조사 심포지엄’에서 발표됐다.
이번 심포지엄은 광양현감 어영담의 일대기와 임진왜란 당시 무훈, 광양출신 참여자와 희생자, 진월 선소에서의 판옥선 건조 고증, 향후 관광자원화 등의 발표와 토론으로 이어졌다.

발표에 나선 노기욱 문화재학 박사는 ‘광양민과 어영담의 초계활동’에서 “임진왜란 때 광양민의 구국활동은 지대하다. 전쟁 중에도 조정의 군수물자를 직접 조달에 자발적으로 의연곡과 군기 등 물건을 직접 배에 싣고 현지로 갔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광양현감 어영담과 지역민은 하나였다. 어영담은 광양현감에 부임해 전시의 군사행정을 빈틈없이 펼침으로써 혼란을 수습하는 등 광양백성과 하나가 됐다”고 덧붙였다.

이병근 회장은 ‘광양 선소와 광양현감 어영담’발표에서 “광양선소에서 배를 만들었다는 것은 ‘임진장초’에 나온다. 만력 22년(1594년) 1월 10일 판옥선 4척을 만들어 이중 2척을 먼저 한산도 진중으로 출발 한다”는 예를 들었다. 이어 “광양 선소에 어영담과 광양수군의 전공비와 판옥선 건조 등으로 관광자원화 하자”고 덧붙였다.

조동래 광양문화원 이사는 ‘광양현감 어영담의 생애’ 에서 “어영담은 함종어씨로 함안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여러 진(鎭)의 장수 밑에서 경험을 쌓아 고흥 여도에서 만호를 지냈다.
1564년 식년시 무과에 등제 하고 평안도 강계 고산리 첨사, 사천현감(1580년 12~1582년 2월)등을 거쳐 1591년 3월 광양현감에 부임해 1년 7개월을 보냈으나 1594년 4월 9일 한산도 통제영에서 전염병으로 운명을 달리했다”고 말했다.

토론에 나선 나기수 전 전차부대 지휘관은 ▷어영담의 묘소를 찾는 데 DNA검사 도입 ▷어영담이 어떻게 이순신 장군 휘하 핵심 인물이 될 수 있었는가 ▷이순신과 어영담 현감, 우리의 선조 광양민들의 애국정신과 살신성인의 정신과 혼이 오늘의 광양민들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지 등을 집중 질문했다.

이은철 광양제철중 역사교사는 “광양 진월 선소에 관한 연구 논문이 부족한 이유는 남아 있는 사료가 없기 때문”이라며 “호국선양회가 다른 지역 선소를 답사해 굴강 등 비교분석을 했는지, 그리고 어영담 전공비추진과 선소 복원 및 판옥선 건립 등은 연구와 보존을 철저히 해야한다”고 주문했다.

이수영 광양시민신문 주필은 “어영담이 바닷길을 잘 알게 된 것은 호남과 영남 바닷가에서 수군과 장수로 잔뼈가 굵은 경험의 산실이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며 “어영담의 최종 품계는 절충장군(정3품)으로 뒤에 선무원종공신에 등재된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한편 광양문화원은 이번 ‘광양현감 어영담의 사료조사 심포지엄’을 마침에 따라 올해 말까지 사료집을 발간해 지역 공공시설과 학교 도서관 등에 배부할 계획이다.

또한 호국항쟁유적인 선소지를 상대로 안내문과 기념비 등 전란 속에서 내 고장과 나라를 지킨 광양지역민들의 활약상과 무훈을 후세에 길이 보전하는데 적극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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