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영담이 누구야?
사실 광양문화원이 올해 광양현감 어영담 심포지움과 사료집 발간을 계획한다는 소식이 알려질 때만 해도 지역의 분위기는 대부분 냉소적이었다. ‘대체 어영담이 누구 길래 저런 사업을 한다는 것인가. 또한 일부 아는 사람들마저도 후손도 없고 그것도 418년 전 일을 어떻게 찾아내고 규명을 한단 말인가’가 당시 분위기였다.

그러나 광양현감 어영담은 418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광양 진월의 호국선양회 원로들과 광양문화해설사인 옥룡의 정순배 어르신, 광양문화원 박노회 원장 등이 각기 사연을 접하고 팔을 걷어 부친 결과물이다.

어영담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미 부활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신뢰했기에 그가 진중에서 전염병으로 운명을 달리했을 때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비통함을 금치 못한다’고 했던 것이다.

어영담은 임진년인 1532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동안 어영담에 대해 연구한 이가 드물어 생몰년대가 불분명 했으나 광양문화원 사료조사위원들이 어영담의 과거 급제 문서인 ‘방목’을 입수해 1532년으로 확정 지었다.

어영담은 1564년 식년무과에 병과 3등(전체 11등)으로 합격했다.
前 萬戶 魚泳潭, 壬辰, 景游, 本咸從, 居咸安, 父 內禁衛 迪順副尉 行忠武衛副司猛 深, 慈侍下, 雁行
어영담은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에 음직으로 만호(고흥군 점안면 여도)를 지냈음을 방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도만호지요. 생년은 임진년 1532년, 몰년은 난중일기에 나오듯이 1594년 전염병으로 죽었다. 자(字)는 경유(景游)이고, 본관은 함종이며, 경상도 함안이 거주지였고, 부친은 내금위 적순부위(정7품) 충무위 부사맹을 지내신 어심(魚深)이고, 합격당시에는 모친만 생존한 상태이고 형제는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사실 어영담은 아들이 두명 있었다. 응해와 응린이다. 그러나 당시 이들은 아들을 출산하지 못해 대를 잇지 못한다.

어영담은 1580년 12월 ~ 1582년 2월까지 사천현감, 1584년 2월 ~ 1585년 3월까지 무장현감, 광양현감에는 1591년 3월에 부임했고, 임진왜란 이전에는 창성부사를 지냈다. 그 밖에 여러 군직(軍職)을 지냈다.

어영담의 전과는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광양현감으로서 옥포해전부터 시작해서 1594년초의 제2차 당항포해전까지 모두 참전해 큰 역할을 했다. 한 번은 이순신과 웅천해전에 출전했을 때 임발영이 광양현 순찰을 하면서 창고에 쌓인 600석의 양곡을 문제 삼아 어영담을 파직시켰다.

그러자 김두 등 126명의 광양지역민들이 연서를 통해 곧바로 어영담 구명운동에 나섰다. 결국 이충무공의 요청에 의해 수군조방장이 되었으며 옥포,합포,적진포 지역에서 해전을 치러 총 42척의 왜선을 격파하며 승리를 이끌었으며 6월 당포와 당항포, 7월 한산도 안골포, 9월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해전을 이끈 장본인이다.

이충무공이 어영담 장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다음 난중일기 내용과 장계 한 편을 보면 알 수 있다.
4월 초9일[정사] 맑다.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비가 쏟아졌다. 어 조방장[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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