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겨울이 점차 깊어지면서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도솔봉 자락을 자주 오르내렸다.

흔히 산행이란 누구에게나 모처럼의 쉼을 동반한 가볍고 신나는 나들이이겠지만 내게는 순전히 일을 위한 것이었다.

산을 갈 때마다 수십 년 동안 산에 익숙한 일행들과 보조를 맞추어야 했는데 산에 관한 한 신출나기인 나에게는 다소 버거운 일이기도 했다.

좀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도솔봉 부근은 여전히 세상 저편처럼 또렷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언제 내렸는지 모를 눈이 골짜기마다 쌓여 겨울 내내 녹을 줄 몰랐고 그곳을 스쳐오는 바람에 부딪는 나무들의 스산한 비명소리가 갈 길 바쁜 내 마음을 얼어붙게 하였다.

능선과 골짜기를 수시로 넘나드는 바람은 여전했고 길을 막고 선 바위들과 뿌리 채 뽑힌 나무들이 가끔 낮설게 누워있었다.

나는 이름 모를 골짜기를 오르고 내리다가 해가 능선을 넘어가면 지친 다리를 끌며 돌아오곤 했다.

겨울산에는 예기치 않게 아름다운 풍경들이 내 앞을 가로막아 서곤 했다.
철 이른 생강나무의 터질 듯한 꽃망울과 홀로 피었다가 흐트러짐 없이 서있는 산수국의 마른 꽃몽오리와 가지마다 투명하게 얼음 꽃을 피운 나무들의 항변과도 같은 모습은 차가웠던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집에 돌아와 몸을 던지듯 누우면 그날 내가 하루 동안 걸었던 산길과 무료히 서있던 나무들과 새들의 맑은 소리가 다가왔다.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던 것인지 과연 내가 그 산에 올랐던 것인지 하루 동안 줄 곳 이어진 나의 자취는 선이 되어 되돌아왔고 쏟아지듯 몰려오는 나른함으로 곤히 잠들곤 했다.
겨울이었기에 깊은 산중이었기에 그런 풍경은 흔한 일상이었다.

산촌에 살면서도 가끔 깊은 산을 찾고 싶을 때가 있었다.
추위에 굴복하듯 집안에 틀어 박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못마땅한 일이었다.

늦게 일어나 집 주변을 잠시 서성이다보면 어느 듯 해는 서산에 걸쳐있었고 덧없이 사라지는 시간 앞에서 마음마저 물기를 잃곤 했다.

그럴 때 마다 먼 산은 나를 향해 손짓을 했고 용기 내어 다가가면 다시 새로워질 수 있는 힘을 주곤 했다.

어쩌면 산이 높은 이유도 그를 스쳐간 세월만큼이나 많은 온갖 지혜와 인내심을 차곡차곡 쌓아둔 때문인 듯했다.

그것은 심약함을 치유하고 늘 부족함을 호소하는 우리의 결핍을 채워주는 데 매우 요긴한 것들이었다.

지나온 어느 시절이 그립거나 앞날이 걱정스러울 때면 매번 산이 그 해답을 주곤 했다. 그래서 산으로 향할 때마다 산은 내게 무엇을 깨우쳐 줄 것인지 나는 어떤 것을 가져갈 수 있을지 내심 기대를 걸곤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돌아오는 어떤 것도 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그래서 내가 산에서 얻는 새로운 체험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이 항상 교차되면서 한데 섞이기도 했다.

줄곧 산길을 가다가도 나는 이따금 바위에 걸터앉아 거친 숨을 고르곤 했다.
구슬땀을 흘리며 힘들게 산을 오르다보면 그동안의 애쓴 대가처럼 주어지는 하늘이 나를 푸르게 했고 발아래로 우뚝 선 나무들의 쉼은 한층 깊어 있었다.

산의 맑은 공기 때문이었을까?
야산의 그것과는 다르게 나무들의 피부는 매끈했고 가지마다 윤기가 흘렀다.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그늘 속에서 더욱 밝고 선명했다.
그러나 언덕에서는 함께 서있는 나무들의 치열한 삶이 엿보였다.

한줄기의 빛이라도 먼저 받아들이기 위해 다툼하듯 잔가지를 뻗었고 반면 빛을 얻지 못한 나무와 가지들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하늘 높이 오른 나무들은 서로에게 가까운 이웃이자 경쟁자였다.
빛을 향해 오랜 시간을 숨가쁘게 달렸고 장애물이 없는 하늘에 이르러서야 그간의 회포를 풀 듯 넓은 가지들을 펼쳤다.

섬세한 잔가지들은 하늘 아래서 꽃인 듯 때로는 잎인 듯 풍성하고 자유로웠다.
나무들은 능선을 넘나드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렸고 가끔 서로의 시린 뼈마디를 부딪치며 울었다

침묵하는 나무들이 연주할 수 있는 겨울의 소리였고 외로움의 소리였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소리였기에 쓸쓸하고 처연했다.
흔들리는 나무들도 제자리에서만 맴돌던 날들을 후회하는 것이었을까?
하늘은 무심하게도 푸르렀고 바람 속에 머물러있는 나무들만 삐걱대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무 아래에는 지나온 흔적을 말하듯 메마른 낙엽들로 빼곡했다.

가끔 횡으로 부는 바람에 낙엽들은 파르르 휩쓸리며 나무들 사이로 낮게 떠돌았다.
길을 덮은 낙엽을 지날 때마다 나의 다리는 촉수가 긴 더듬이 역할을 했다.
어느 길이 엇을까?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땅이 꺼지며 내 몸은 허공을 가르며 어디론가 던져졌다.
갑자기 몸은 아무도 기억할 수 없는 세상 저편에 닿은 듯했다.

절벽으로 떨어진 듯한 공포감으로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곧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포충망에 걸린 새처럼 낙엽 속에 갇힌 채 꼼짝 할 수 없었다.
웬일인지 그 자리를 떨치고 나가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끊어진 듯했고 내 귓가로 바위를 적시며 흐르는 물소리가 숨을 죽이듯 멀어지고 있었다.
나를 덮은 낙엽들은 가볍고 따뜻했다.
내 거친 숨과 뒤척임에 따라 잎들은 조심스럽게 바스락거렸다.
내 주위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나와 더불어 몸을 눕히듯 낮아지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의 시작이며 끝일 수도 있는,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애써 찾고자 했던 곳이 아니었을까?
나는 겨울나무들 세상에 안긴 채 동면에 든 한 마리의 야생동물이 된 듯했다.
바람이 멎고 힘겹게 지나온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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