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을 걸으며

▲ 하조나라 대표 김세광

“아빠 ! 저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언제나 좋은 시를 쓰는…”
“그래? 전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글을 쓰며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제는 제 인생에서 시를 빼놓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전공(경영학)은 어떻게 할 거냐?”
“아직 잘 모르겠어요. 좀 더 두고 보려고요. 그렇지만 열심히 살아볼께요”


속 깊이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듯 녀석의 어조는 평소와 달리 조심스럽고 간곡했다. 그의 말투는 오랜 동안 시간을 두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른 듯 했다.

나는 그가 가고자하는 길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다급하게 내 말의 중간을 파고 드는 바람에 해야 할 말을 접고 말았다.

이제는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말이 새삼스 럽게 가슴 한 켠을 아리게 했다. 그가 힘들게 지나왔던, 글로 인해 아파했던 시간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대학에 들어가 경영학과로 진로를 바꾸면서 글을 쓰는 것에서 다소 관심이 멀어진 듯했다.

어쩌면 그것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걱정이 덜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사는 올곧은 길이라 생각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군대에서 휴가를 나올 때마다 손에는 시집이 들려있었고 그의 일상을 닮은 내용의 글이나 시를 수시로 SNS에 올리곤 했다.

한 밤중에 근무를 서거나 휴식하는 시간마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녀석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시심을 불러낸 듯했다.

글은 또래에 비해 깊이가 있었고 현상을 꿰뚫어보는 집요한 힘이 있어보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의 희망이자 목표이기도 했지만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또한 넘어야 할 큰 장벽 이기도 했다. 그는 한동안 높은 장벽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왔고 나는 언젠가 그가 스스로 해결 할 것이라 믿었다.

하릴없이 많은 시간들이 흐르면서 나는 가끔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인내하며 기다렸다. 어느 날 그는 거짓말처럼 자리에 서 훌훌 털고 일어났고 그동안 생각했던 그의 계획을 소상하게 밝혔다.

우선 복학을 미루고 넓은 서울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이 운영하는 클래스에 등록하여 글쓰기에 대한 전문적인 기법을 익혀보겠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생각의 터전을 넓혀보고 싶다. 그래서 사글세방이라도 하나 얻어 혼자 지내면서 알바를 찾겠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구체 적인 생각들을 따라 가보니 그가 그리는 계획 들은 언뜻 내가 생각하기에도 훌륭하고 근사해 보였다.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요목조목 펴 보이는 녀석을 보면서 분명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 차있는 듯해서 믿음이 갔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멋진 계획이다. 열심히 해봐!”

진지해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장단을 맞추어주면 녀석은 신이 나는 듯 소리의 톤이 높아졌고 눈동자는 더욱 맑아졌다. 그가 뿜어내는 말 속에는 희망에 찬 언어들이 어두운 하늘에서 별이 반짝이듯 살아나왔다. 전에 없었던, 아버지와 아들이 한뜻이 되어 희망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들이 즐겁고 행복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계획한 일들이 생각한 대로 따라와 준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누구나 큰 어려움 없이 희망하는 일들을 이루고 싶어 하지만 정작 어려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그러나 참을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내자식만을 생각하는 아비의 가당찮은 바람이 아닐까?

녀석을 바라보면서 태평양을 힘차게 휘저어 다니는 한 마리의 연어를 생각했다. 모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몸을 만든 후에 먼 바다를 나가 자유롭게 유영하는…. 그러다가 언젠가는 저 자란 고향을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 오는 삶의 긴 여정이 눈앞에서 꿈틀거렸다.

작은 포구가 포용 할 수 있는 것은 잔잔한 물결과 극히 작은 파도일 뿐, 녀석은 이제 좀더 넓은 바다에 나가 큰 파도를 감당하며 스스로 부딪히고 싶은 나이가 된 듯했다.

어쩌면 나는 아이들을 먼 곳으로 떠나보내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회지 생활을 버리고 산촌에 들어온 것은 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으니 13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나무, 풀, 꽃 등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자유로운 자연 속으로 들어왔다.

긴 소나무 아래 다소곳이 들어앉은 학교도 작고 소박했다. 도시는 문명의 흐름에 따르지만 산촌은 자연의 변화에 따라 움직였다. 주변의 풍경도 사람들도 계절 따라 다른 색깔로 다른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을 익혔다. 아이들 눈에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로웠고 따뜻했으며 또한 불편한 투성이었다.

그러나 곧 자연스러움에 익숙해졌고 자연은 곧 생활과 여러 생각으로 이어져있었다. 그속에서 보낸 시간들이 어찌 보면 글을 쓰도록 부채질 한 것은 아닌지….

중학교를 마친 내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기 전날 밤 어머니는 나에게 이따금 눈물을 훔치며 말하곤 했다.

“객지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매우 고생스러울 것이다. 밥은 꼬박꼬박 챙겨먹고 우선 건강 해야 된다. 어딜 가든 남들이 꺼려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먼저 찾아서 해라. 성공이란 열매는 그런 곳에서 싹이 튼단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 단둘이 저녁을 먹으면서 어머니가 내게 했던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아들 에게도 똑같이 되풀이 하고 있었다.

“시인은 아픈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그의 아픔을 대신 아파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줄 아는 눈과 넓은 마음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시인이 된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지만 그에 걸맞는 생각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 깊은 시심이란 힘든 시간이 지난 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니 묵묵히 시간을 견디어라” 그러나 나는 아들에게 바라는 것에 비해 번듯한 방 한 칸도 마련해 줄 수 없는 무능한 아버지였다.

녀석은 다행스럽게도 씩씩하게 우리 앞에 주어진 모든 상황을 이해해주었고 오히려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해 고마워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모든 일들을 즐겁게 감내할 것이라 믿는다.

또한 그의 따뜻한 감성 앞에서 세상의 높은 장벽과 어려움들이 스르르 녹아내렸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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