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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독립운동가 28인 국가보훈처 인정다시 보는 우리지역의 독립운동가
최인철 기자  |  hwakae72@gyci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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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0  23: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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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0주년을 맞았다. 이날 민족의 의기가 모여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했고 우리민족은 일제에
대한 저항과 해방운동을 전개하는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우리 지역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이들의 삶을 희생했다.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인정한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는 모두 28인이다. 광양시민신문은 국가보훈처가 인정한 28인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다시 살펴볼 계획이다. 그러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이 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46인의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서훈을 신청한 상태다. <편집자 주, 가나다 순 배열>

■김갑곤金甲坤선생은 광양읍 도월리에서 1907년 10월 태어났다.

선생은 1926년 광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능생수산학교能生水産學校를 1년 동안 다니다가 귀국했다.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깊게 인식하고 있던 그는 1929년 6월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해 갔다.

그는 동생 김희곤金希坤과 함께 1931년 12월 광양 도월리에서 박경래朴坰來의 지도로 전남적색농민조합全南赤色農民組合을 결성하고 조직적 항일운동을 펴나갔다. 이 조합은 새로운 단계의 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체다. 구성원들은 사회과학 학습을 통해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자각하고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길러 나갔다.

1933년 5월 1일 광양 용인리에서 김기문金基文 등과 함께 혁명가 등을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가 이 일로 인해 동년 9월 체포돼 1935년 7월 19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받기까지 1년 9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2년 9월 소천했다.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김상환 선생은 1909년 3월 당시 골약면 태인리에서 태어났다.

1926년 11월 3일 왕재일王在一, 장재성張載性 등이 중심되어 조국의 독립과 사회과학연구를 목적으로 항일학생결사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한 후 광주학생들은 항일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그 주동 학생으로 활동했다.

1928년 10월 김보섭金普燮과 함께 당시 광주읍내에 있던 김시성金時成의 하숙집에서 김몽길金夢吉, 여도현呂道鉉 등과 만나 항일운동 방안에 관해 의논한 뒤 이들은 회합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하면서 동지 규합에 힘써 1929년 6월경에는 회원이 20여명에 달했다.

이 무렵 동경에서 돌아온 장재성이, 성진회 해체 이후 분산적인 활동을 지양하고 조직적으로 활동할 것을 주장, 광주시내 각학교 학생지도자들은 김기권金基權의 하숙방에 모여 비밀결사체인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헸다. 이때 부서도 정했는데 그는 김보섭과 함께 조사선전부원으로 선임돼 동지의 모집 및 선전 활동의 일을 맡았다.

독서회중앙본부는 독서회원의 목적 수행을 위한 재정활동으로 소비조합 설치를 계획하는데 그는 장재성 등과 독서회중앙본부의 임원들과 수차에 걸쳐 모임을 갖고 같은 해 9월에 소비조합을 설치했다.

이에 앞서 동년 6월에는 광주고보생 20여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광주고보독서회를 조직, 대표 겸 조직교양부위원으로 피선돼 활동했다.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독립운동 때에는 학생들을 지휘해 농구실農具室을 때려 부수고 삽·괭이·목봉 등을 꺼내어 광주고보 가두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다. 이로 인해 일경에 피체된 그는 금고 6월,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 받았다.

또 광주학생 독서회 관련에 대해서는 다시 주동자로 지목돼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피검된 학생 중 최고형인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으나 항소해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77년 2월 세상을 떠났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상후 선생은 1869년 5월 광양 옥룡면 운평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일 광양군 광양읍에서 장날을 이용, 김석용金錫瑢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해 다수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음식점에서 30여명의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의 당위성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됐다.

같은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해방을 1년여 앞둔 1944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석용 선생은 1894년 2월 광양읍 인동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일 광양군 광양읍에서 장날을 이용해 김상후金商厚 등과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써서 곳곳에 붙이는 한편 주민들을 규합해 다수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같은 해 5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공소했으나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1955년 4월 세상을 떠났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영호 선생은 1904년 4월 광양읍 인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7일 광양군 인덕면 독립만세운동에 이어 3월 29일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박용수朴瑢洙, 김석용金錫瑢 등과 함께 이재갑李在甲의 집에 모여 장날을 이용,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후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와 태극기를 만들고 다수 군중을 모으는 격문을 작성해 김태훈金泰勳, 김태성金太星 등으로 하여금 각 마을마다 붙이도록 하고 거사의 취지를 널리 전파하려다가 일군 헌병에게 발각돼 체포됐다.

같은 해 5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6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사망년월은 확인되지 않았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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