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유한농장 설립…전남 시설원예의 시작

고 이윤수 선생을 아십니까?

진월면과 진상면 청암뜰, 그리고 광양읍 도월리 농업의 공통점은 시설원예가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이지요. 양상추와 오이, 토마토, 쌈채소로 대표되는 우리지역의 시설원예는 매실을 넘어선 고소득작목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시설원예의 도입은 농업의 산업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절과 기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게 농업입니다. 그야말로 시설원예 도입 전 우리네 농업은 하늘의 뜻과 선택에 따라 풍년과 흉작을 가늠해야 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저 하늘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발만 동동거리뿐, 갑작스럽게 찬 기운이 스며들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농업의 기본적인 틀 자체를 바꾼 것이 바로 시설원예입니다. 농업을 계절의 지배 하에서 해방시키고 기후의 변덕스러움을 이길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시설원예이기 때문이지요. 햇볕은 물론 온도를 조절하고 물공급 체계를 갖추면서 사실상 거의 모든 채소를 사계절 구분치 않고 식탁에 내놓고 되었으니 그 공이 실로 크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시설 재배는 1920년대 대전과 송정리에서 보온 재배로부터 시작됐다는 게 통설입니다. 이후 1954년 플라스틱 필름이 생산되면서 본격적인 비닐터널과 비닐 규모가 커지고 고정화되면서 재배작물도 다양해진 이후 과채류를 중심으로 촉성 재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더나가 1970년대에는 자연광에 의한 보온 위주에서 벗어나 난방과 관수시설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1980년 초부터는 각종 보온자재가 농가에서 실용화된 데 이어 시설 내 태양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지중축열하우스와 축열물주머니가 실용화 시대를 맞고 있지요.

현재는 스마트 체제의 반달로 더욱 손쉽게 관리가 가능해졌는데 이는 앞으로 더욱 발전할 예상이어서 시설원예의 시대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농업의 수도라고 불리는 전남지역 역시 5300여ha 전국면적의 10%에 이를 정도로 시설원예는 농업의 중요한 위치를 점유 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남지역 시설원예의 모태가 광양사람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바로 고 이윤수 선생입니다. 옥곡면 출신인 선생이 승주군 해룡면에 일군 유한농장이 바로 전남 시설원예의 시작이었습니다.

선생은 부친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해방 이후 귀국하기까지 일본에서 생활했습니다. 선생의 부친은 도일한 다른 한국인과는 달리 일본의 앞선 농업기술을 누구보다 성실히 배웠고 해방을 앞두고는 오히려 왜인들을 농업을 앞지르는 수준에 도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방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온 선생은 자신보다 2년 앞서 귀국해 산간을 개간하고 있던 형 이이수와 함께 1ha 정도의 땅을 일구면서 농사를 처음 시작했지요. 어깨너머로 배운 선친의 농업기술을 잊지 않고 자신만의 농법을 개발하기에 힘썼습니다.

무엇보다 1954년 유한농장을 설립해 토마토와 오이 등을 재배했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비닐하우스를 통해 이들 작목을 수확해 냈습니다. 이것이 전남 시설원예의 시작이었지요.

더나가 선생은 4-H 운동 보급 초창기인 1955년 모범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농업터전이었던 승주와 순천을 넘어 동부 6개군에 4-H운동을 전파했는데 1956년 선생이 전국 최초 개설한 4-H독농가농장은 1970년 대 중반까지 서울 농대생들의 실습농장으로 활용되는 등 우리나라 근대농업을 이끈 요람이자 산실이었다고 평가받고 있지요.

1961년 서정 김동혁 선생이 백운산농장을 설립하자 선생도 여기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것은 서정 선생과 선생의 남다른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서정 선생은 한 조선인 농가를 소개받았는데 다름 아닌 이윤수 선생의 부친이었던 게지요.

귀국해서도 두 분은 한국농업을 걱정하고 발전에 헌신한 동지로 남았던 것입니다. 서정 선생이 현 광양원예농협의 전신인 광양곡수협회를 만들자 광양 일대를 대대적인 밤나무 식재운동을 함께 일으킨 것도 선생이었습니다. 지금은 광양의 대표 작목이 된 매실나무 역시 이들의 땀이 스며들어 있지요.

서정 선생은 이윤수 선생에 대해 신의를 매우 중시한 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요, 바로 선생이 맹장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일입니다.

수술을 기다리던 선생에게 농장으로 교습생들이 찾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선생은 결국 수술을 미뤘고 결국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탈수상태까지 빠지는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었던 것이지요.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선생의 농업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할 일이지요.

한편 선생은 백운산농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1965년 유한농장에 낙농업을 도입한 뒤 그 부산물을 시설원예의 퇴비로 활용하는 복합영농의 길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역할이 필요한 곳이면 열일을 제쳐두고 뛰어다녔고 그래서 유한농장은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전해옵니다.

선생은 1961년 농촌재건과 농민복지증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식산포장을 수훈했고 1963년 농촌의 태양상이라고 불렸던 전남도지사 표창, 1969년 농림부장관 표창, 같은 해 농협중앙회장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그러나 평소 앓아왔던 지병으로 1988년 예순 일곱의 젊은 나이로 세상에 작별을 고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성실함과 열정은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농업인의 면면에 무엇보다 시설원예에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고 있는 많은 원예농업인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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