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을 맞았다. 이날 민족의 의기가 모여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했고 우리민족은 일제에 대한 저항과 해방운동을 전개하는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우리지역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이들의 삶을 희생했다.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인정한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는 모두 28인이다. 광양시민신문은 국가보훈처가 인정한 28인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다시 살펴볼 계획이다. 그러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이 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46인의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서훈을 신청한 상태다. <편집자 주>

■ 김영호 선생은 1904년 4월 광양읍 인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7일 광양군 인덕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이어 3월 29일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박용수朴瑢洙, 김석용金錫瑢 등과 함께 이재갑李在甲의 집에 모여 장날을 이용,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한 후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와 태극기를 만들고 다수 군중을 모으는 격문을 작성했다.

또 김태훈金泰勳, 김태성金太星 등으로 하여금 각 마을마다 붙이도록 하고 거사의 취지를 널리 전파하려다가 일군 헌병에게 발각돼 체포됐다. 같은 해 5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항소했으나 6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기각돼 옥고를 치렀다. 사망연월은 밝혀지지 않았다.

1992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됐다.

■ 김응백 선생은 1870년 진상면 어치에서 태어났다. 황영문黃永文 의병에 가담해 광양 일대에서 활약했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분격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해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했다.

김응백은 이 같은 시기에 황영문 의진에 투신해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08년 8월 5일 황영문 의병장의 지휘 아래 의병 150여 명과 함께 총과 칼을 휴대하고 광양군 진하면津下面 망덕리望德里에 들어가 마을에 거주하는 일본인 석전경작石田耕作과 각야인평角野仁平의 집을 포위하고 발포했다. 이들이 놀라는 가운데 각야인평 및 그의 가족 4명을 총격, 사살했다. 그리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각야인평 소유의 양총 1정 등 무기류와 군수품을 노획하는 한편 그들의 가옥에 석유를 뿌리고 방화하여 소각시켰다.

같은 해 7~8월 무렵 그는 의병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칼을 휴대하고 진하면 진목정眞木亭 안윤석安潤錫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징수했다.

이후에도 그는 동지 강치선姜致善, 고운서高雲西외 2명과 함께 1908년 12월부터 1910년 1월까지 칼과 총을 휴대하고 진상면 비촌마을 황병욱黃炳郁의 집에 들어가 그의 아들 송현宋玹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았다.

이로 인해 체포돼 1910년 10월 26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항소했으나 이듬해인 1911년 1월 16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돼 순국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김지태 선생은 1911년 7월 광양읍 인동리에서 태어났다. 1925년 전남 광양공립보통학교光陽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한 선생은 1931년경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같은 해 12월 인동리에서 노동계勞動契를 조직해 노동자들에게 항일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8월 28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전남재건광양지부全南再建光陽支部, 일명 ‘전남적색농민조합全南赤色農民組合’를 조직하고 책임비서가 됐다. 이 단체는 비밀결사로서 실업청년회를 내세워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소작쟁의를 지도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이 같은 활동으로 1933년 9월 2일 일경에 조직이 발각돼 체포됐다.

1년 9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35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1937년 5월 소천했다.

2005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 김채룡 선생은 1921년 6월 광양읍 인동리에서 태어났다.

1941년 3월 광양광업소光陽鑛業所에 근무하면서 김원주金源柱, 오호영吳浩榮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모으고 비밀결사 백의회白衣會를 조직해 동지규합에 힘썼다. 1941년 8월 일본 경도京都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의 야간 중학부에 진학한 뒤 1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한 뒤 국내 동지들과 서신을 교환했다. 1941년 말 경도 굴천掘川경찰서에 체포됐다.

1942년 11월 2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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