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펴낸 홍쌍리 명인

다압면 섬진강이 맑게 흐르는 백운산 자락에 5만평, 5천여 그루의 매실나무에 밥풀처럼 하얀 매꽃이 천지사방 흐드러진 청매실농원. 한반도를 찾아온 봄이 가장 먼저 상륙한다는 이 청매실농원을 일생을 바쳐 일군 홍쌍리 명인이 시집을 냈다. 새벽부터 일어나 흙을 일구고 난 뒤 이슥하게 찾아온 밤을 틈타 평생을 써내려간 98편의 시가 석류 알처럼 빼곡히 담겼다.

1943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홍 명인은 1966년 광양군 다압면으로 시집을 왔다. 당시 손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백운산의 깊은 산자락과 섬진강 맑은 물소리 밖에 없는 그야말로 깡촌 중에서도 깡촌이었다.

비교적 여유로웠던 친정집이었으나 아버지는 그를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홍 명인에 따르면 어렸을 적 노래를 잘해 가수로 키워 보자고 여러 사람이 찾아왔으나 그의 아버지는 “딸 광대 만들기 싫다”며 부산에 있던 삼촌 집에 보내 밥도 짓고 건어물도 팔게 했다. 그때가 열여섯 무렵이다. 그가 일한 곳은 부산 국제시장이다. 그곳에서 장사의 잔뼈가 굵었다. 훗날 시아버지가 될 김오천 선생을 만난 곳도 바로 이 국제시장이다.

그는 1966년 24살의 나이에 광양 다압으로 시집왔다. 신혼의 단꿈을 꾸기도 전에 곧 험난한 시집살이와 고단한 농사꾼의 삶이 시작됐다. 힘들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이 낮선 땅이 두려워 그는 수없이 보따리를 쌌다가 풀었다.

밤이면 밤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던 어느 날 그의 눈에 하얗게 꽃망울 터트린 매꽃이 불현 듯 찾아 들어왔다. “엄마, 울지 말고 나랑 살자” 딸 같은 매꽃이 말을 걸었다. 정말 딸 같은 매화가 말을 걸었다. 답답했던 숨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았다. ‘엄마, 힘들면 내게 기대요“ 딸 같은 매화가 그의 어깨를 가만 다독였다. 그렇게 매화와의 사랑이 시작됐다.

그리 뿌리를 내린 광양살이가 어느 새 53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숱한 시간이 홍 명인의 삶을 스쳐 지나는 동안 내살 같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삶의 기둥이 돼 주던 시아버지가 곁을 비웠다. 그 역시 20대에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아야 했고 30대에는 류마티즘으로 2년 7개월을 목발에 의지해야 했다.

교통사고로 7년 동안 등이 굽은 채 생활해야 했던 시련도 스쳐갔다. 만만치 않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삶이 야차처럼 두렵게 찾아올수록 쉼 없이 매실나무를 일구었고 흙을 만지며 땅과 말을 섞었다. 그렇게 일군 청매실농원이었다.

홍 명인의 시집 속에는 매화와 함께 살아온 53년 광양살이가 고스란히 담겼다. 행복과 기쁨보다 서럽고 아프고 슬픈 시간들이 내내 많던 나날이었으나 그의 시는 슬플지언정 따스하다. 평소 그가 말해 온대로 매화를 딸 삼아, 매실을 아들 삼아 살아온 시간들을 바라보는 홍 명인의 가슴 깊은 시선이 잘 묻어나는 시편들이 시집을 채우고 있다.

1장 ‘나무처럼 나를 지켜준 이들’에서는 산골살이에 대한 애환이 묻어난다. “다독다독 안아주면 그 큰 눈에 샘물처럼 눈물 고인 수야 아부지 앙상한 당신 보듬고 잠재울 때마다 머슴 같은 이 마누라 눈물에 수야 아부지 얼굴 다 젖네” <보소 수야 아부지>라는 제목의 시다.

아직 신혼의 때가 쉬 가시지 않았던 시절 경기도 남양의 한 광산에 투자했다가 망한 남편은 이후 오래도록 삶의 뼈대가 무너진 채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 앓았다. 홍 명인은 그런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오래 아팠다, 시를 읽어 갈수록 목울대가 뜨거운 이유일 게다.

낯선 땅에 둥지를 틀고 난 뒤 흙과 몸을 부비며 살던 그가 백운산 자락에 묻히고 섬진강물 낮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촛불을 켜고 써내려간 초창기의 시들의 심중은 그렇게 에이고 아련하고 사무치는 그리움이 묻어 흐른다.

또한 매실농사에 평생을 바칠 수 있도록 엄하게 곁을 지켜준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은 사무침의 감정으로 담겼다. 오래 묵은 사부곡은 시집 곳곳에 숨어 때 되면 싹을 틔우는 청보리처럼 온 산 푸르게 흔들거리고 있음은 말해 무엇하랴.

2장 ‘한결같이 흙만 보고 산 세월’은 매화 뿐 아니라 그가 흙을 일구면서 만났던 작은 인연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 버들강아지와 해국이나 감국, 벌개미취, 봄동, 호박꽃, 제비꽃에다 이름 모를 들꽃이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음을 고백한다. 무엇보다 평생 그의 노동과 함께 했던 ‘흙 묻은 몸뻬’바지에 대한 감사함을 전하는 지점에서 스스로의 삶에 대한 위로도 엿보인다.

3장 ‘풀처럼 때로는 흔들렸으나’에선 모진 시집살이와 농사일에 서러웠던 나날의 기억들이 박혀있고 4장 ‘되리라, 아름다운 농사꾼’을 통해선 베풀면서 사는 농사꾼의 행복과 언제나 고향이고자 하는 엄마의 마음을 담았다. 5장 ‘노래가 된 시’는 홍 명인 스스로 그의 시에 가락을 입힌 작품들로 채워졌다.

홍 명인의 시는 화장기가 없다. 눈을 다시 씻고 들여다봐도 두건을 쓰고 밭을 매는 시골 아낙네 모습 그대로다. 애써 꾸미지 않고 눈에 들어온 풍경과 속을 채웠던 감정들을 때로는 땀으로, 때로는 눈물로 쏟아냈다. 그래서 꾸미고 잘 다진 시들에게서 읽을 수 없는 남다른 감동이 있다.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한 주억거림 같은 것 말이다.

매화사랑 하나로 1997년 한국전통식품명인으로 지정된 뒤 이듬해 석탑산업훈장과 대통령상, 2001년 농업최고권위를 인정받는 대산농촌문화대상을 수상한 홍쌍리 명인,

그러나 그가 이날 세상에 내놓은 시詩차림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다만 그의 삶 자체다. 투박하게 쏟아놓은 진솔한 일상의 편린들을 읽어내는 동안 ‘어머니’라는 이름 뿐 아니라 땅과 자연, 생명을 바라보는 농사꾼의 고운 시선으로 정성껏 시를 지어왔음을 느낄 수 있다.

밥을 짓던 농사를 짓던 시를 짓던 무언가 짓는 일에 정성이 쌓이면 그것은 다 거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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