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풍경,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

▲ 하평마을 전경

정겨운 시골길을 구불구불 지나다보니 초록빛을 머금은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저 멀리 고양이 한 마리가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에 가던 길을 멈춘다. 이내 마을회관으로 보이는 계단 밑에 자리를 잡고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한가롭게 일광욕 중인 고양이를 피해 태극기가 산들산들 휘날리는 마을회관 건물 앞에 서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미닫이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만 내밀었다. ‘아름답고, 화목하고, 살기 좋고, 공부하는 하평마을’이라는 삐뚤삐뚤 써내려간 글이 눈에 띈다.

“아이고, 벌써 오셨어요?” 회관 구경 삼매경에 빠지려던 찰나 박옥근(54) 이장이 갓 부쳐낸 바삭바삭 따끈한 파전을 들고 웃으며 반긴다.

▲ 하평마을 박옥근 이장

새내기 이장의 고민

고된 농사일에 지친 몸을 달래줄 시원한 막걸리가 상에 올랐다. 어느새 회관 안은 하하호호 어르신들의 화목한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옥룡천변에 넓게 펼쳐진 뜰에 위치한 ‘하평마을’은 26가구, 약 30명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광양에서 살았어요. 이후 서울에서 쭉 살다가 97년에 다시 내려왔으니 광양에 다시 온지는 한 20년 됐겠네요” 박옥근 이장은 한국외대 법학과 출신으로 광양에서 가방끈이 제일 긴 이장이다.

“이제 겨우 4개월 남짓 된 새내기 이장이에요. 아무래도 이장직은 처음이다 보니 경험이 부족해 어려움이 많이 따라요. 하지만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생각하고 있죠” 박 이장이 멋쩍은 듯 웃어보이자 마을 어르신들은 “에이, 충분히 잘하고 있어”라고 말하며 그를 격려했다.

▲ 마을 어르신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건배를 하고 있다.

박 이장이 막걸리를 한잔 들이켰다. 그리곤 앓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 하평마을은 10가구 정도가 소위 말하는 빈집이에요. 자식들은 객지에 나가 살고 부모님은 이곳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신 경우, 주인 없는 빈집이 되는 거죠. 빈집을 팔아 젊은 사람들이 유입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자식들이 나중에 나이가 들면 고쳐 살려고 하기 때문에 팔지 않아요. 빈집들이 거의 대부분 그래요”

빈집이 다수 분포하는 지역은 대체로 ‘성장-유지-노후화-쇠퇴-슬럼’의 생애주기 중 ‘쇠퇴’ 단계에 속해있다. 즉 하나의 도시가 쇠퇴하면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빈집의 발생이라는 것.

2015년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빈집은 106만 8919가구로 사상 처음 100만 가구를 넘어섰다. 뿐만 아니라 1990년 이후 매년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 이대로라면 2050년에 전국의 빈집 수는 약 300만호로 추정된다.

화재와 붕괴위험, 범죄유발 등 다양한 문제를 발생시키지만 소유주 동의 없이 함부로 철거할수 없는 빈집. 이는 박 이장이 안고 가야할 숙제로 남았다.

▲ 어르신이 자랑하던 100년 넘은 돌담길의 모습

“항상 솔선수범하겠다”

어르신 한분이 “회관 앞 돌담길 봤는가?”라고 물었다. 이어 어르신은 “아마 저게 100년은 넘었을 거야. 내가 85살 먹었는데, 내가 어릴 때부터 있었거든. 돌담길 말고도 마을 입구에 있는 옥평사는 봤을지 모르겠네”

이에 박 이장은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옥평사는 약 270년 전 이천서씨(利川徐}氏) 재실(향선재)로 매년 음력 2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라며 “옥평사는 잘 보존되어 있는 우리 마을 문화유적지지만 돌담길과 고인돌, 그리고 500년 된 느티나무는 사람들이 잘 몰라요. 저는 이런 것들을 잘 보존해서 문화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면 좋을것 같은데, 주민들의 의견이 상충되는 부분이 있어 여러 방향으로 고심 중에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깨끗하고 청결한 마을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벽화꾸미기, 방치된 농기구 주차장확보 등 마을을 위해 여러 가지 사업들을 구상 중에 있어요. 주민들이 저를 믿어주셔서 이장으로 선출됐으니, 그에 따른 책임이 주어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죠”라며 “항상 솔선수범하고, 공부하는 하평마을 이장이 되도록 노력하려고요”라고 덧붙였다.

▲ 고인돌 유적지 부근에 위치한 느티나무 3그루

마을 어르신들에게 또 뵙겠다는 아쉬운 인사를 드린 뒤, 인터뷰 중 마을의 자랑거리로 꼽았던 커다란 느티나무를 보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선선히 부는 바람이 시원하기라도 한 듯 나뭇가지는 나풀나풀 춤을 추고 있었다. 한참을 나무 옆에서서 마을 전경을 내려다봤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달콤한 휴식이었다.

고요한 풍경을 뒤로한 채 돌아오는 길, 포부가 남달랐던 새내기 이장님과 다정하고 친절했던 하평마을 어르신들, 팔자 좋게 일광욕을 즐기던 고양이 녀석까지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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