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 : 왼쪽부터 5.18민주유공자 유인섭, 신홍섭, 서우석, 오권열, 임철규 씨다. 이은들 5.18당시 시민군으로, 혹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오권열(57) 씨의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광주 5.18 당시 시민군으로 차가운 캘빈을 손에 들었다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그 흔적조차 알수 없는 그립고 아픈 친구에 대해 말하던 중이었다.

그들은 까까머리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피 흘리는 광주를 보다 못해 함께 시민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았고 친구는 죽었다. 그러나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먼저 간 친구는 그렇게 지금까지 행불자라는 이름으로 권열 씨의 가슴에 묻혔다. 영원히 그 생이 푸르른 고등학생으로 말이다.

다시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까닭모를 죄책감과 회한, 그리고 든든한 언덕이었다가 지금은 가고 없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이들이 있다. 살아남았음으로 하여 기억하고 그 기억으로 인해 생채기 난 삶을 견디며 살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오늘 만난 유인섭, 신홍섭, 서우 석, 오권열, 임철규 씨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오월 광주는 여전히 고통스 럽고 아픈 현장이자 현재진행형인 삶의 과정이다. 10일간 진행된 학살현장에서 동지들과 시민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조국의 군인들이 휘두른 총칼에 무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고 그들은 그 아비규환 같은 현장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채 오늘을 살고 있는 까닭이다.

이들을 포함해 현재 광양에서 살고 있는 5.18관련 민주유공자는 모두 20여 명이다. 이들 민주유공자들은 지난 2014년 작은 모임을 결성한 뒤 그날의 고통을 안고 살고 있는 서로를 위로하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5.18일 광주민중항쟁 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5.18광주항쟁의 핵심현안으로 “발포명령자를 찾아 내는 등 제대로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는 점을 꼽았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화해와 용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목소리를 냈다.

서우석 씨는 “39년이 흘렀지만 진상규 명에 아직까지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한 채 시간만 끌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부의 조치도 미흡하다”고 지적한뒤 “무엇보다 여전히 군부독재의 후예들이 광주의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광주를 모독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은 광주시민은 물론 그때 돌아가신 분들을 두번 죽이는 일”이라며 “(자유)한국당은 역사에 죄 짓는 일을 당장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오권열 씨는 “당시 광주를 진압한 계엄군 역시 군부독재세력의 희생자일 수 있고 학살에 대한 법적인 책임도 이미 지났다. 하지만 당시 계엄군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바로 그날의 진실을 증언해 달라는 것”이라며 “아직 광주의 어머니들 가운데는 죽은 자식들의 시신들 찾지 못한 채 한을 안고 살고 계신 분들이 많다. 이 분들을 위해 암매장한 곳에 대해서 만이라도 계엄군의 양심선언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신홍섭 전 도의원은 “광주항쟁이 한국 민주주의에 끼친 평가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게 사실”이라면서도 “주동자 및 항쟁에 있어서의 미국의 역할 등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광주시민과 광주 항쟁이 완전하게 명예 회복됐다고 보기 힘들다”며 “비록 주동자에 대한 법적 조치는 마무리 됐다고는 하지만 발포 명령자 등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작업 들을 서둘러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그들의 증언

■ 박동호(65)씨는 계엄군이 광주를 점령하자 이에 맞서 시민군이 됐다. 18일 광주에 진격한 계엄군은 체류탄과 곤봉으로 시위를 진압하다 21일 오전 12시를 기해 발포를 시작했다.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나온 애국가는 발포명령 이었다. 시민군도 무장을 결정했다.

24일 박 씨는 해남으로 내려가 무기고를 부수고 얻은 무기를 들고 다시 버스를 타고 광주로 돌아오던 길에 나주 금성산 부근에서 계엄군을 만났다. 당시 계엄군은 광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 바 광주봉쇄작전이었다.

계엄군은 무장상태도 확인하지 않은채 버스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마침 헌병대 중사로 있다가 전역한 친구가 하얀 속옷을 찢어 총구에 매달아 보이며 항복을 표시 했지만 한동안 총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계엄군에 붙잡힌 그는 금성산에 있던 부대로 끌려가 모진 폭행을 받았다. 군홧발에 짓이겨지거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세 번을 기절했다. 그렇게 기절을 반복하자 상무대로 끌려가는 다른 시민군과는 달리 계엄군은 그를 나주 정신병원에 가뒀다. 말이 정신병원이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20일을 갇혀 있었다.

■ 오권열(57) 씨는 광주 평동이 고향이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그는 학생들과 함께 역시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계엄군의 발포소식을 듣고 시위대가 무장을 시작하자 그 역시 손에 총을 들었다.

계엄군 발포 하루 뒤인 22일 여러 시민 군과 함께 무기를 얻기 위해 나주로 내려갔다. 무기를 챙긴 뒤 24일 다시 광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모든 길은 계엄군에 막혔고 더 이상 광주의 소식을 알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걸어서 광주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광주비행장 옆길을 택했다. 그러나 도중 부상자가 발생했다. 고향집이 코앞이었으나 가지 못하고 교회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잠을 청하는데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누군가 신고를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계엄군의 야만적인 폭행은 붙잡힌 순간부터 시작됐다. 곧바로 상무대로 끌려 갔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재판도 없이 4개월을 살았다. 매일 매일 폭행이 찾아왔다.

■ 임철규(59) 씨는 순천출신으로 당시 전남대 1학년이었다. 당시 전남대는 총학 생회장 박관현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고 그 역시 군사훈련거부 등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MBC씨가 불타던 21일, 아버지가 끝내 숨졌다. 순천 선산으로 모셔야 했으나 외부로 나가는 모든 길이 통제된 상황이었다. 겨우 주월동 공동묘지로 아버지를 모셨다. 묘를 쓰던 중 갑자기 나타난 헬기가 사격을 가했다. 아마도 작업도구를 총으로 착각, 시민군으로 오인한 모양 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25일 시내로 나갔다. 녹두서점 김상집 씨 동생이 버스로 학생시 민군을 모집 중이었다. 그렇게 시민군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완강한 시민군의 저항에 광주를 빠져나간 상태였다. 계엄군이 물러간 뒤 상무관은 관 천지였고 통곡의 바다였다.

26일 새벽, 계엄군 재진입 소식이 들렸다. 시민군은 계엄군 진입을 막기 위해 출동채비를 서둘렀다. 총을 들고 나가려던중 도청 앞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아버지의 삼오제를 지내야 하니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황실장도 “돌아가라”고 채근했다. 그는 총을 반납하고 집으로 갔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 재진입이 시작됐다. 수많은 시민군이 죽고 붙잡혔다. 그렇게 그는 살아남았다. 삶이 아팠다.

그해 10월 그는 학생들에게 김대중의 최후진술서를 돌리던 중 경찰에 체포돼 광주서부경찰서로 끌려갔다. 학생 20여 명과 함께 보안대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그곳에서 한 달 간 구금됐다가 다시 상무대로 끌려갔다. 재판을 받았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이듬해 1월, 풀려났다.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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