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재(광양경찰서 전 수사과장)

▲ 임광재(광양경찰서 전 수사과장)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뒤 수건걸이에 걸려 있는 타올로 물기를 닦는다. 타올 끄트머리에는 자수로 선명하게 “2008년 00월 00일 ㅇㅅㅂ님 팔순기념, ㄱㅇㅈ여사 칠순기념,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녀일동”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것들을 음미해 보노라면 그 타올을 받았던 때와 장소 그리고 당시 즐거워하던 가족들의 모습을 비롯한 상황이 떠오르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에 걸쳐 그 타올을 준 사람과의 인간관계의 변화도 반추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수납장 안에 빼곡하게 채워진 대부분의 다른 타올에도 00 개업기념, 00 준공기념, 00의 날 기념, 00 첫 돌... 이라고 적혀 있고 그것들은 하찮은 것 같지만 많은 사실들을 얘기해주고 있다.

팔순과 칠순 기념 잔치를 한 노부부의 나이 차이는 10년이고 영감님은 11년 전에 팔순이니 지금은 아흔이 넘었을 것이며 저 타올을 받은 이후로 저분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은 적이 없으니 생존해 계실 것이라는, 그리고 5년 전 00의 날 기념일에 저 타올을 받았으니 올해는 몇 주년이 될 것이라는 등등.

무슨 기념타올이든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받은 적이 있을 것이며 어느 집이나 화장실 수납장에 기념타올은 몇 장씩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사초를 불태워 버리게 하여 나중에 실록을 보완하려고 하는데 자료가 없어 사적으로 개인들이 써놓은 일기를 수집하여 실록을 작성한 적이 있었다고 하던데, 오늘날 국가적으로는 대통령 기록물을 비롯하여 모든 자료들을 디지털화하여 보존하고 있지만 온나라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타올들을 수집하여 짜 맞춘다면 대한민국 내에서 치러진 모든 행사의 대강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전에 수사 일선에서 일할 때 어떤 미혼모가 영아를 남의 집 대문 앞에 유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사의 단초는 영아를 싸서 버린 타올이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어느 사무실 개소식 기념 타올이었는데 그 개소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탐문을 한 결과 범위를 좁히다 보니 그 미혼모를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타올은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물(水) 다음으로 우리들의 신체에 접촉하는 중요한 물건이며 사회적 관계망의 증표 중의 하나로 남아 있는 것들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타올의 디자인과 섬유의 질 그리고 새긴 글씨를 보면 그것을 준비한 사람의 정성과 마음 씀씀이가 드러나 있다.

타올의 크기가 작고 두께가 너무 얇은 것은 얼마 사용하지 않아서 축 늘어져 곧 걸레로 쓰거나 버려지나 섬유의 질이 좋은 적당히 두꺼운 타올은 여러 해가 가도 새 타올처럼 느껴진다.

타올을 만드는 실은 대체로 30수에 150그램 또는 40수에 170그램 정도의 타올이 가정에서 사용하기에 무난하다고 한다. 40수는 30수에 비하여 실두께가 가늘어서 더 많은 실가닥이 들어가 포근함이 더하고 수분의 흡수력이 좋긴 하나 내구력은 떨어진다고 한다.

값어치로 따지면 얼마 안 되는 타올이지만 그것을 선물한 사람의 의도대로 그렇게 날마다 오래도록 또 요긴하게 사용하는 물건이 또 있을까 싶다.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잘 세탁된 보송보송한 타올로 몸을 닦고 나면 상쾌함이 더해진다.

우리가 어느 음식점의 화장실에 들렀을 때 수건걸이에 걸려 있는 타올의 상태에 따라 그 업소의 평가에 대한 척도가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답례품으로 만든 기념타올이 우리 집 화장실 수납장에 있다가 나의 몸을 닦는데 사용되듯이 내가 만들어 선물한 타올이 다른 사람의 집안 수납장에 자리하면서 그 들을 위하여 사용된다는 사실이 인간관계의 끈을 이어 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도 불원간에 기념할 일을 만들어 튼튼하고 예쁘고 질 좋은 타올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몸을 씻고 난 후 타올을 대신해 물기를 닦을 다른 물건이 발명되지 않는 한 타올을 기념 선물로 나누어 주는 습속은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며 또 유용하게 사용되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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