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도쿄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Ⅲ-①

▲ 김보예 쓰쿠바대학교 교육학 박사과정수료

2019년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 3월은 3.1운동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로 전국이 들썩였다. 1919년 3월 1일, 비폭력 평화 정신이 빛났던 그 위대한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첫 고동이 울렸다.

모든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선언한다.
-1919. 2. 8. 독립선언서 중-

한 번쯤 들어 본 글귀일 것이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도쿄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이하, 도쿄 YMCA 회관)에서 낭독된 ‘2.8 독립선언서’의 일부이다.


▲ 재일본한국 YMCA_-2. 8. 독립선언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은 도쿄 유학생들

1918년 1월 8일 미국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평화 원칙 14개조’를 제시한다. ‘평화 원칙 14개조’는 ‘민족자결주의(National Self-determination, 民族自決主義)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민족자결주의란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해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다.

‘민족자결주의’는 도쿄 유학생들을 자극하였다. 1918년 11월 22일 도쿄 조선유학생 학우회(이하, 학우회)에서는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민족자결과 조선의 독립을 주장한다. 당시, 학우회는 재일조선인 유학생이 조직한 단체 중 세력이 가장 컸으며, 처음 유학 간 학생들은 반드시 가입해야만 했다. 또한 학우회는 잡지 ‘학광지’를 발간하여 배일사상,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민족의식이 강한 단체였다.

학우회 웅변대회로부터 8일 뒤인 11월 30일. 일본의 각 학교에서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이 또 다른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마찬가지로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 1월 6일 도쿄 YMCA 회관에서 열린 웅변 대회는 2.8독립선언의 시발탄이 되었다.

웅변대회가 끝난 1월 7일 새벽 1시. 김도연의 제안으로 최용팔, 서춘, 백관수, 윤창석, 송계백, 이종근, 김상덕, 최근우, 이광수, 김철수가 주요 멤버가 되어 2.8 독립선언을 본격적으로 기획한다. 이처럼 도쿄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고 있을 때, 세계의 정세는 그들에게 등을 돌린다. 1919년 1월 18일, 전승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27개국 대표는 식민지 국가의 독립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모여 강화회의(평화회의)를 연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내용, 즉 ‘각 민족의 독립’은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의 식민지에만 적용시킨다.

▲ 재일본한국 YMCA_2·8독립선언의 주요 멤버 11인

2월 독립 선언, 그 시작.

1919년 2월 8일, 도쿄에는 30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2.8 독립선언의 중심 멤버들은 아침부터 집합하여 오전 10시경에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한 ‘2.8 독립 선언문’과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정부 요인(일본 귀족원, 국회의원 등),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 언론기관 앞으로 보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임원선거를 명목으로 유학생대회가 개최된다. 이날 참여한 유학생은 600명에 달했다. 1918년 말, 조선인 유학생은 총 769명이었으며, 그중 642명이 도쿄에 거주하고 있었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대부분이 독립 선언에 참여한 것이다. 집회 도중 경찰이 난입하였고, 이광수와 최근우를 제외한 주요 멤버 9명은 도쿄재판소에 송치되어 출판법 위법으로 예심을 거치지 않은 채, 2월 13일에 재판을 받는다. 그리고 방청이 금지된 상태에서 재판심리를 마친 후, 개인차는 있으나 도쿄감옥에 약 1년 동안 투옥된다.

2.8 독립선언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2.8 독립선언 그 후, 주요 멤버들이 잡혀간 도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거사 다음 날인 2월 9일 남은 유학생들은 히비야 공원에서의 2차 시위를 계획한다. 3일 뒤, 1919년 2월 12일, 2월 24일에 유학생들은 다시 한번 도쿄 한복판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다. 그것도 천황이 사는 고쿄(황거) 옆, 히비야 공원 소음당에서.

히비야 공원은 일본제국주의 시절 정치적 무대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국민 광장’, ‘국가 광장’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정치적인 성향이 다소 퇴색되었지만, 여전히 예술 축제, 음악 콘서트, 국제친선 운동회 등 각종 문화·경제·정치적 이벤트가 열린다. 우린 도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장소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이다.

▲ 히비야공원 소음악당
▲ 히비야공원 소음악당 내부사진 :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히비야 공원 소음악당에서 뜨겁게 우리의 염원을 외친 세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전하고자 한다. 다음 편은 2019.7.22(월) ‘천황이 사는 고쿄(황거) 옆,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 만세!-도쿄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Ⅲ-②로 게재될 예정이다.

<참고문헌>

[한국서적·논문]
김인덕(1999) 「일본지역 유학생의 2·8운동과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pp.1-27

김인덕(2011) 『망국의 추억 –재일조선인 민족운동-』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 총서

윤소영(2018) 「일제의 ‘요시찰’ 감시망 속의 재일한인유학생의 2⋅8 독립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97집, 한국민족운동사학회, pp.39-88

최태육(2019) 「3·1운동만세운동을 촉진 시킨 순국 청년 송계백(宋繼白)」 『일본의 심장부에서 “독립을 외친 청년들을 만나다”-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 인물열전』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서울YMCA)

[일본서적]
樫原辰郎(2017, 가시하라 다쓰로)『帝都公園物語』(대일본제국의 공원이야기),幻戯書房(겐키쇼보)

進士五十八(2011, 신지 이소야)『日比谷公園: 一〇〇年の矜持に学ぶ』(히비야 공원:100년의 긍지를 배우다), 鹿島出版会(가키마출판회)

新藤浩伸(2014, 신도 히로노부)『公会堂と民衆の近代: 歴史が演出された舞台空間』(공회당과 민중의 근대: 역사가 연출된 무대 공간), 東京大学出版会(도쿄대학출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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