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공감능력을 키워가는 것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나이 들어 국어·국문학을 공부하는 가장 큰 즐거움은 다양한 문학작품 속에 배어 있는 삶의 모습들을 보며 인식하고 공감해가는 것이었다.
가문을 생각하며 신분에 걸 맞는 배필을 고르려는 부모님의 뜻에 따르다 나이만 들어가는 노처녀가 친구 아무개는 손자를 보았다는 소식을 접하며 갖는 애환이 있고, 온 갓 꽃들이 만발한 정원을 바라보며 춘정을 억누르는 양반 댁 청상과부의 깊은 한숨이 있으며, 양반이면서도 벼슬길에 들지 못해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고 삭 바느질 일감을 들고 들어오는 고달픈 마누라를 바라보는 선비의 고뇌가 있다. 뼈 빠지게 일해도 양반들과 권속들의 수탈로 초근목피로 허기를 달래는 힘없는 백성들의 원성이 있고,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받는 것도 부족하여 자식들에게 까지 그 신분의 굴레를 물려주어야 하는 노비나 종 등 비천한 신분인 사람들의 회한이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도 친인척 애경사가 아니면 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 춘삼월 꽃이 피는 삼월 삼짇날이면 교외나 산 같은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음식을 나누어먹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지져 먹으며 가무를 즐기는 여성들의 놀이가 있었고,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며 노동의 고됨과 삶의 고달픔을 잊으려는 아름답고 소박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를 보며 나는 부족함을 위로받고 과분함이 없는지 성찰하곤 했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에는 편하고 즐거운 여행으로 독서와 ‘경험의 소중함’을 주고받는 것 같다. 서양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해외여행이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경험의 대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어린 청년들을 위한 엘리트 교육의 최종단계로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을 여행토록 했다 한다. 역사적으로도 서양인들의 앞선 여행인식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인도 전통 브라만사회에서는 한 개인의 일생을 네 단계로 나누고 청년시절 경전 등 공부에 열중하는 학습기를 거쳐, 가정을 이루고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와, 가정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숲속에 은거하는 임서기를 지나, 무소유로 탁발 수행하는 유행기(遊行期)로 삶을 마감하기를 희망하였다고 한다. 철학자들처럼 여행을 통해 생각을 가다듬거나, 나만의 우주를 넓혀간다는 거창한 생각이 아니라도 좋을 것이다. 머리위에 태양을 지고 얼굴에 바람을 스치며 발밑의 땅을 열심히 걸어가는 “개처럼 걷는 것이 최고의 여행”이라고 유별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일상의 무료함을 벗어나 색다른 풍광과 명소와 문화유산들을 둘러보고 맛집을 들리는 등 이색적인 경험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때론 어떤 종교나 과학용어로도 설명할 수 없고 어떤 필력이나 물감이나 사진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상상을 넘어서는 신비로 가슴이 뛸 때가 있고,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소박한 사람들의 미소를 보며 다름을 인정하고 인연을 소중히 하다보면, 지나간 일들의 후회와 미련, 닥쳐올 일들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사라지게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여행 또한 경험이 늘면 공감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패키지로 처음 시작한 여행은 모처럼 가져보는 자유를 기화로 맛있는 음식과 즐길 거리를 찾아 인증샷으로 차별의 시대 우위를 과시할 수 있는 자랑거리를 쌓기에 분주함으로 시작한다. 우쭐한 기분에 잘못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하고, 외국에서 한글로 “금연”, “낙서금지” 등의 글이 써지는 원인제공자가 되어 국격을 훼손할 수도 있다. 차츰 경험이 쌓이면 여행안내서와 관련독서를 통해 박물관이나 미술관, 건축물이나 공원과 거리 등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의미와 맥락을 살펴보며 앎의 즐거움에 깊이를 더한다. 나는 처음 외국여행을 나갔을 때 특히 서양인들이 공항이나 광장, 카페등지에서 장소를 기리지 않고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비싼 항공료와 여행경비를 들여 외국까지 와서 하나라도 더 보지 집에서 읽어도 되는 독서를 할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참 후에야 여행의 즐거움은 장소나 방법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이해했다.
또한 동행한 여행 인솔자나 현지가이드의 설명을 경청하여 그 지역이나 그 나라의 관습과 전통을 존중해주고 시간을 잘 지키고 통솔에 잘 따라주는 것도 결국 공감능력을 길러가는 것이 아닐까.
어디에선가 와서, 참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결국 돌아가는 여행은 우리네 인생과 같다. 여행을 할수록 언제부터인가 이국적인 풍광 속에서도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늘고, 편안함보다 어려움이, 순탄함보다 꼬임의 추억이 더 소중히 느껴지기도 하는 경험. 감탄과 경이 속에서도 날이 가면 그리워지는 곳은 등 따뜻하게 대고 편안이 잠들 내가 살아온 집뿐이라는 생각. 그래서 여행은 공감하는 것이고, 마지막 우리가 가는 길 최후의 동반자도 공감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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