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고독이 우울증과 성취로 나누어지는
두 갈래길, 그 터닝 포인트

혼자서 산에 오르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재미가 있고, 때론 ‘글감’이 떠오르기도 한다. 나에게는 벅찬 주제지만 “인간은 노력하다 보면 방황도 한다”는 말로 자위하며 운을 떼 본다. 어느 시인이 노래하듯 우리는 앞에 놓여 진 많은 갈림길에 마주서게 된다. 어떤 사람은 고독의 심연에서 우울증으로 한없이 추락하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또 어떤 사람은 고독을 기회삼아 취미 같은 제 2의 인생을 찾아내 성취의 희열 속에 삶을 찬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터닝 포인트는 찾을 수는 있는 것일까?


나는 우울증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큰 한방을 기대하는 심리 때문일까. 우리 인생사 또한 선명하게 눈에 보이고 인식되는 성취를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농사를 짓고 글을 쓰면서 욕심을 내려놓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성실하고, 선하고, 정직하게 살아보려 노력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으며 고독은 잊고 산다. 주제의 답변으로 턱없이 부족하지만 내 경험을 중심으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본다.

스스로의 몸이 놀이의 대부분이 되던 어린 시절, 마을 뒤 어느 무덤의 잔디밭에서 나는 친구들과 대굴대굴 구르고 놀던 때를 먼저 생각해 본다. 서너 번 구르다 보면 동작을 멈추려 해도 쉽게 멈춰지지 않아 당황한 기억이 있다. 어떤 상황이 계속 진행되면 그것이 생각이든 행동이든 뜻밖의 관성이 붙어 멈추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슬픔과 우울은 소비적이다”라는 말로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 자꾸 찾다보면 생필품 쓰듯 일상이 된다는 뜻이다. 세우에 옷이 젖기 전에 고독은 가능하면 빨리 벗어나야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정도가 아니라 너무도 잘 만들어져 신에 도전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 힘의 원천인 피의 양을 결정하면서 인체에서 부피 대비 피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뇌와 남자의 상징부분이 동시에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피를 조금 적게 넣어주셨다 한다.


즉 육체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머리는 잠시 쉬어야하고 정신이 무언가에 몰입을 하면 육체의 기능은 후순위로 유보가 된다는 뜻이다. 소소한 딸꾹질도 숨을 참는 고통을 감내하며 생각이 가 있는 곳을 바꾸듯 중요한 것은 나에게 집중 하지 않고 타자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나는 농협에서 퇴직을 하고 37년간의 정신노동을 대신해서 농사라는 육체노동을 택했다. 내가 기른 50여 작물은 하나하나가 말을 걸어오고 스킨십을 하자고 달려들며 은퇴 후 갖기 쉬운 외로움을 느낄 틈을 주지 않았다. 서로 봐달라고 가지에 매달리며 곡예를 하는 가지, 고추, 오이들. 숨바꼭질하자며 풀숲 뒤로 숨는 호박과 참외, 흙을 비집고 삐쭉 얼굴을 내밀며 반갑다 인사를 하는 고구마와 감자, 익을수록 겸손해야한다며 고개를 숙이는 조와 수수 등 수많은 작물들이 자식들이 떠난 자리를 생명력이 넘치는 싱그러운 모습으로 메워주었고, 계절 따라 택배라는 이름으로 자식들과 나를 다시 연결해 주었다.


지금은 나는 글을 쓰는 일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70을 넘으니 농사일이 육체적으로 무리가 오고 농사 진지 10년이 넘었으니 새로운 지적호기심이 발동해서다. 농사나 글쓰기 모두 그저 즐기는 수준이지만 외로움을 느끼기 쉬운 노년을 보내기에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농사는 실존적 삶의 즐거움을 가르쳐 주고, 글쓰기는 나를 뒤돌아보게 하고 자연과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며 공감능력을 키워준다. 내 나이에 일주일에 한 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조금은 힘이 든다. 산책길에 떠오른 글감이 책상에 앉으면 잊혀 지기 일쑤이고, 적당한 인용사례를 찾으려면 나름 분류는 해놓아도 30권이 넘는 메모노트를 한 시간 이상 뒤적이다 찾을 때가 많다. 기억력이 나빠 연관된 사례들을 직조해 나만의 특색 있는 어휘와 문장을 짜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무엇보다 즐겁다는 사실이다. 나는 미국의 시인 겸 소설가 찰스 부코스키의 “지금 이 순간 글을 쓸 수 있을 때만 작가다” 라는 말을 좋아한다. 글을 쓸 수 있고, 지금 쓰고 있는 이 순간에서 자유의 날개 짓을 한다.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아무 욕심 없이 오직 나만의 존재함으로 심호흡을 한다.


농사를 10여년 짓고서야 “움직임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꿈을 실현하는 힘이 있다”는 글을 보고 감격했다. 최근에는 슈테판 클라인이 ‘행복의 공식’이라며 말한 “기대하지 않은 일에 숨겨져 있는 자극을 제대로 평가 할 줄 알고, 익숙한 것을 매번 새로운 시각에서 보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삶의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글을 대하며 이미 스스로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해 본다.


언제부터인가 오고 가며 만나는 아이들이 그렇게 좋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이 세상은 타락하였으며 우리가 돌아갈 낙원은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세계다”라는 글을 보기 전 부터다. 인터넷에는 ‘키덜트’라는 말이 돌아다닌다. ‘어른아이’라는 뜻이란다. 나이 들면 아이로 돌아간다는 말이 좋은 말인가 보다. 매사 정을 붙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면 뜻밖에 쏠쏠한 재미가 생겨 고독은 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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