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아버지께서는 효심에 최우선을 두어 갈등을 삭히고 할아버지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심을 지키시며 살다 가신 것 같다. 밥상머리 앉으실 때 마다 막둥이인 나에게 반복되는 할아버지 이야기들은 실천하라는 당부의 뜻보다 소중한 추억에 대한 회상과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늘 담겨있었다. 동학에 참여하여 모진 고생을 한 할아버지는 아들 4형제를 무학으로 오직 농사에만 종사할 것을 강요하시며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등허리에 뿔난 놈(지게를 진사람)은 전쟁도 피해간다. 묵은 쌀독, 묵은 나뭇벼늘 두고, 상머슴, 깔담사리(꼴 벼는 어린머슴) 거느리고 농사짓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니라. 높은 나무 위에는 오르지 말고, 깊은 물에는 들어가지 말며, 처자식 거느린 몸으로 남의 빚보증은 절대 서지 말아라. 집터를 잡을 때는 배산임수도 중요하지만 산태가 날 가능성이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자식을 나무라되 살이 내릴 수 있으니 손찌검은 절대 말며, 뜨거운 국물이 있을 수 있는 밥상은 어린아이 위로 넘기지 말라. 처음 남의 집을 방문할 때에는 신발 벗어놓은 위치와 측간 위치를 확인해 두어라. 아버지의 말씀은 누나들이 여름날 마을공동 우물에서 새로 길어와 떠올리는 놋쇠 대접에 칠부 정도 담긴 냉수처럼 정감 있게 찰랑거리고 투명하였다.

땔감을 하실 때는 일부러 추운 날을 골라 언 개꽃짱아리나 그루터기가 도끼질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경험을 즐기시고, 갈퀴나무 짐은 누구보다 예쁘게 쌓아, 배우지는 않으셨지만 오랜 긍정적인 삶이 가르쳐 준대로 모든 것을 이름답게 받아들이고,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요령을 터득하신 것 같았다. 내가 밥맛이 없다며 짜증을 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나이에 밥과 반찬이 입안에서 만나는 시간이 어디 있다냐. 반찬 집어넣으면 밥은 목구멍 넘어간 뒤고, 밥을 넣으면 반찬 넘어간 뒤지.” 간 갈치와 찔룩게(칠게)가 최고의 성찬이던 시절 하루해가 짧다 일하고 피로한 몸으로 밥상을 받지만 시장이 반찬이라 작은 돌덩이도 소화 시켰다고 호언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소리는 쌀독에 쌀이 떨어져 바가지가 쌀독 밑바닥을 긁는 소리였다는 아버지, 자식들 끼니 걱정에 농한기에는 김과 소금을 짊어지고 한재를 넘으며 주먹밥과 철철 흐르는 계곡물로 허기를 때운 경험담일까. 소중한 이야기 하나를 ‘팔진미’라는 이름으로 들려 주셨다.

옛날 어느 마을에 5대 독자로 태어나 부모님을 도와 일은 하지 않고 어리광만 부리는 어린총각이 있었다. 끼니때마다 반찬투정을 하는 아들에게 하루는 아버지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너는 우리 집 5대 독자로 조상님들 제사를 모셔야 할 소중한 몸이다. 네가 밥맛이 그리 없다고 하니 너의 몸이 쇄약해질까 걱정이 되는구나. 그래서 나는 오늘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팔진미’를 너에게 구해먹일까 한다. 아버지는 오직 소금물과 꽁보리밥만으로 만든 주먹밥을 삼베수건에 싸서 짊어지고 아들과 집을 나선다. 얼마를 걸었을까. 뙤약볕에 일하던 농부들이 점심을 들기 위해 집으로 향하거나 나무그늘 아래 자리를 잡을 즈음 아버지는 철철 흐르는 개울물에 발을 담그며 주먹밥하나를 꺼내 맛있게 드시며 “너는 조금만 참으면 팔진미를 먹을 터이니 그리 알아라.” 고 말하셨다. 머리 위 나뭇가지에서는 매미들이 땅속에서 7년을 보내고 기껏 나무그늘에서 2주면 생을 마쳐야 함이 억울한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어느 마을 초입 우물가에서 아버지는 역시 혼자 주먹밥을 맛있게 드셨다. 아들은 ‘팔진미’에 대한 기대감으로 점심까지는 참았으나 저녁까지는 도저히 배가고파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소변을 보러 자리를 비운 사이 아들은 주먹밥 한 덩이를 먹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반찬도 없이 먹는 주먹밥 맛이 꿀맛이 아닌가! 언제 오셨는지 아버지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겸연쩍어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웃는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구중궁궐 임금님이 사는 곳이라면 모를까 너와 내가 사는 이 세상에 팔진미가 있겠느냐.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보면 시장기가 생기고 그때 맛있게 먹는 음식이 바로 팔진미란다. 집으로 향하는 두부자의 머리위에서 밝은 달님이 밤길을 환이 밝혀 주고 있었다.

6천만 년 전부터 살아온 개미는 꾸준히 세력을 키워 지구상 개체의 총무게가 72억 인간들 무게보다 더 무겁게 번창하고 있으나, 6백만 년을 살아온 인간은 앞으로 백년후면 멸종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이어지고 있다. 개미는 태어날 때부터 여왕개미, 수개미, 병정개미, 일개미로 명확한 역할대로 태어나 조직을 위해 맡은바 소임에 최선을 다할 뿐 처지를 비교하거나 불평이 없다한다. 심지어 수명도 여왕개미는 10년까지도 살지만 병정개미와 일개미는 1년 남짓 살고 수개미는 6개월을 넘기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나이를 먹으니 아버지의 살다간 모습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때론 최고의 자유는 순명하는 것이며 자연의 가르침에 따른다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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