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성 희롱의 거리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풍류의 뒷골목』이라는 책에서 읽은 50여년이 지나도 기억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영·정조 어느 시대 아무 고을에 양반댁 선남선녀가 부러움과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첫날밤을 보낸 신랑이 뜻밖에 신부가 숫처녀가 아니라고 주장을 한 것이다.


신부댁 부모도 딸의 착함과 현숙한 행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천부당 만부당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다툼은 결국 송사가 되어 고을 원님이 판가름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님은 양갓집 규수의 몸을 조사할 수도 없고 규수에 대한 세간의 평도 나무랄 데 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다 관찰사에게 고견을 구했다. 관찰사 또한 별 묘책을 찾지 못하고 결국 임금님께 난감함을 보고 하기에 이른다. 왕은 백성들의 관심이 높은 이 사건을 지혜롭게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노력하였으나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궁리 끝에 왕은 화공을 시켜 친정집 신부가 기거하던 방을 상세히 그려오라 명한다. 신부의 방에는 조그만 다락방이 있었다. 왕은 관리의 파견을 통해 다락방을 정밀조사하게 되었고, 신부가 처녀시절 다락방에서 때로 건강한 젊음의 욕구를 은밀하게 해소한 흔적들을 확인한다. 왕은 다락방을 오르내리다 처녀성에 문제가 생겼다 확신하며 생각을 다듬어 판결문을 발표한다. “봄 정원의 푸른 풀은 비가 오지 않아도 자랄 때가 되면 스스로 자라고, 가을동산의 누런 밤은 벌에 쏘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스스로 벌어진.”
가톨릭생활을 하며 경험한 부부일체화운동 프로그램에서 공부한 “느낌에는 윤리성이 없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대상여하를 떠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 느끼는 것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이기 때문에 설혹 이성간이라도 느끼는 것까지는 이상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자연의 이치일까. 삼신할머니의 가르침일까.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느끼고 키워가는 아름다운 본능이 있다. 남녀건 자웅이건 한 쌍의 존재함과 반쪽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세상의 무엇보다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가 되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한다. 우리 조상들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가르침 속에서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를 이야기하며 노동의 고단함과 부양의 벅찬 의무를 견디고 넘었다.


인간만이 갖는 아름답고 세련된 사랑의 행위는 종족보존에 대한 조물주의 보상일까, 유별나게 영민한 인간의 깨달음과 노력의 결과일까, 호기심 많은 인간의 만지고 쓰다듬고 껴안고 싶은 마음과 행동의 진화 때문 일까?


격정이던 지고지순이던 이성간의 사랑은 불을 찾아내고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어내기 전부터 말이 생겨나는 동기가 되었으며 인류 발전의 원동력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섹시하다’는 말은 가장 듣기 좋은 칭찬이 되었고 외모에서 풍기는 성적매력은 물론 유머가 담긴 언어구사와 품위 있는 태도, 재능까지도 성적 매력을 위해 요구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사랑으로 충만 된 섹스의 즐거움은 우리의 DNA로 이어오며 면역 체계를 왕성히 하고, 요실금과 적립선비대증을 예방하며, 혈압을 낮춰주고 심장마비의 위험을 감소시켜주며, 고통을 완화해 주면서 스트레스완화와 불면증 해소 등 인체에 유익하게 작용을 하는 신비의 묘약이라 하지 않은가.


언제부터인가 각박한 시대 탓인지 몇 사람의 잘못 탓이지 가장 순수한 배려와 아낌마저 성희롱이라는 이름으로 의심받는 사회가 되었다. 요즘 114안내나 대표전화를 통한 문의에서 상담자에게 인격적으로 대해달라는 한결같은 주문이 반복됨을 듣고 도리어 인격적으로 의심받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는 때가 있다.


지난번에 산 아파트는 유치원생이나 초중학생들이 많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이 너무 예쁘고 서울 사는 손자들 생각도 나서 격려와 칭찬의 말을 하며 “할아버지를 만나면 인사를 해야지.”하며 친숙해지려 노력하였다. 시간이 지나며 남학생들과는 악수나 하이파이브 등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으나 여학생들과는 대화만 나누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세상의 각박함을 느꼈다.
이 더운 여름날 땀 흘리며 봉사하는 음식점 종업원에게 위로의 칭찬 한마디도 눈치를 봐야하는 시대가 되고만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삶만큼 세상을 보고 해석한다.”는 정희진의 말이 생각이 난다. 선함은 고마움을 낳고 악함은 의심을 낳는다. 우리의 본성은 사람인자(人)가 말해주듯 어려울수록 서로 손잡고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면서 살아가라한다, 어쩌다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이 무시되고 상처받고 희생되어야 함을 예사로 의심받는 사회가 되고 있을까. 우리가 서로의 남이라면 타인의 남은 우리 스스로가 아닌가. 사람들은 자기의 잣대로 남을 재단한다는 믿음을 나는 갖고 있다. 남을 사랑하고 축복을 기원하는 삶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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