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노인들이 함께 지내며 소통

그 옛날 마을 공동 우물터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했던 풍경들, 두레, 향약으로 이어오던 공동체의 미풍양속이 현대 사회에 접어들며 산업화와 개인주의, 핵가족화로 인해 사라짐에 따라 사회 양극화와 주민 간의 갈등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아파트’라는 공동주택에 살면서도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안타까워한 지역민들은 더불어 함께 사는 방법을 찾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민-관 협력으로 이뤄지는 ‘마을 공동체’ 사업도 그 일환이다. 현재 우리 지역에 어떤 마을 공동체가 있는지, 어떤 활동들을 하는지 매주 1곳의 마을 공동체를 찾아 탐방해본다. <편집자주>

요즘 아이들은 외롭다. 일터에 나간 아빠, 엄마는 저녁 먹을 시간이나 돼야 얼굴 한번 마주할 수 있다. 그때까진 학원이나 돌봄센터를 전전하며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낸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은 멀리 떨어져 살며 각자 생활이 바쁘기 때문에 명절 때나 한번 얼굴 볼 수 있을까 말까다.

요즘 노인들도 외롭다. 한평생 다 바쳐 키운 자식들은 자기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먹고 살기 바쁜데 부담 주는 것 같아 안부전화도, 언제 한번 찾아오라는 말도 꺼내기 쉽지 않다. 명절 때 한번 보는 손주들도 함께 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다보니 한번 안아보자 해도 어색함에 삐죽거리기 일쑤다.

‘대가족의 정’이 그리운 시절이다. 아이들도, 노인들도, 가족이 그립지만 현실이라는 장벽에 외로움을 안고 견딜 뿐이다.

추운 겨울 꽁꽁 언 손주의 손을 꼭 붙잡고 아랫목에 넣어주시며 아껴두신 호빵 하나를 건네시던 할아버지,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도 손주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파 더듬더듬 꺼내시며 이어가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이러한 일상의 소소한 추억이, 이제는 너무 귀한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다.

함께 하는 시간이 없다보니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요즘 아이들이란’ 선입견에 휩싸이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꼰대 같은 노인네가 뭘 알아’라며 서로를 비난하고 무시하는 세대 간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이런 갈등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광영동 영수마을경로당은 조금 특별한 마을공동체 사업을 진행했다. 이른바 아이들과 노인들이 함께 지내보는 시간인 ‘놀세(놀이를 통한 세대공감)’ 프로그램이다.

영수경로당은 전남도 지원을 받아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매주 화, 목 오후 4시부터 1시간가량 마을 어르신들과 광영지역늘사랑아동센터 아이들을 한 공간에 모아 만들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매일 보는 노인들끼리 앉아 TV를 보거나 고스톱을 치며 무료함을 달래던 경로당에 아이들 30여명이 몰려들자 이내 북새통이 됐다. 지난 4월24일 진행된 첫 프로그램은 ‘제기, 한과 만들기’ 시간이었다. 전통문화를 통해 어른들의 지혜와 경험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며 친근함을 더하기 위해 마련된 시간이었다.

이후 두 번은 요즘 아이들의 문화를 어르신들이 함께 누려봄으로써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친환경 슬라임 만들기’, ‘나만의 야광볼펜 만들기’ 시간으로 꾸며졌다.

친손주도, 친할아버지·할머니도 아니고, 얼굴 한번 마주해 본 적 없는 사이기에 공감대가 없어 어색함이 흘렀지만 한두 차례 만남이 거듭되고 시간을 함께하다보니 어느새 소중한 내 새끼, 사랑하는 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다.

어르신들은 아이들이 오길 기다리며 꼭꼭 아껴두었던 쌈짓돈을 꺼내 감자를 삶아오거나 아이스크림을 준비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길에서라도 어른들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건네며 친근함을 표했다.

“옛날에 광영동은 말이야~”
서로의 애틋함은 가정의 달인 5월에 접어들며 더욱 강해졌다. 아이들은 고사리 손으로 직접 만든 카네이션을 어르신들에게 하나하나 달아드리며 감사함을 전했고, 어르신들은 아이들에게 옛날 동네 이야기를 해주고, 연, 송편, 팽이를 함께 만들어보며 다정스러운 말투로 예절 등을 알려주시는 등 사랑을 나눴다.

서로의 사랑과 에너지를 나누면서 어르신들은 신체활동도 많아지고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스마트폰 세상 속에 갇혀 타인과 교류하는 법을 잘 모르는 아이들도 이 시간을 통해 경로효친 사상을 배우고 소통하는 법을 알아가며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서로에게 덕담의 편지를 쓰고, 함께 찍은 사진이 담긴 컵을 만들어 보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아쉬움에 헤어지는 발길이 무겁기는 했지만, 오가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마지막 시간을 함께 했다.

장현익(85) 영수마을 경로당 회장은 “영수마을은 원주민들이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주거지를 이전해 만들어진 마을로, 노인들만 살다보니 애들 구경하기 힘들었다”며 “좀 번잡스럽긴 해도 동네에서 애들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를 듣는 게 얼마만인지, 애들과 함께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 애들 오는 날만 기다려졌다”고 말했다.

마을공동체사업은 참여자들이 주체적으로 사업을 꾸려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어르신과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보니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당시 광영 늘사랑지역아동센터장이었던 장효숙 원장은 봉사를 자처하며 강사섭외, 예산 집행, 서류 정리 등 전반적인 사무업무를 도맡았고, 정양기 영수마을 통장, 정준기, 이근희씨 등이 도와 성공적으로 사업을 마무리했다.

정양기 통장은 “세대 간 장벽을 허물고, 아이들과 노인이 함께하는 밝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많은 분들이 함께 노력했다”며 “다른 지역에서 관심을 갖고 벤치마킹을 하겠다는 연락이 올 정도면 사업이 성공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보통 마을공동체 사업은 마을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수익도 있어 젊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이끌어가지만, 우리는 시간을 낼 수 있는 젊은 사람도 없고, 순수 봉사로만 사업을 이어왔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더 많았다”며 “그래도 취지가 좋고 다들 좋아하시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내년에도 계속 아이와 노인이 함께하는 경로당 프로그램을 진행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