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니 가족 사랑이 새롭다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나는 어느 때든지 눈물을 보이라면 3분 이내에 보여줄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이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호박새끼 몇 개와 열무 두 단을 이고 시장에 다녀와 나에게 학용품을 사라며 지전 몇 개를 쥐어주던 고됨이 배인 가녀린 모습을 생각할 때나 밥풀 먹여 정갈하게 다려 입은 삼배적삼에서 나던 그 좋은 향기를 회상만 하면 70을 넘긴 이 나이에도 눈물이 난다. 어머니는 사후에도 막둥이를 사랑해 이따금 안구(眼球)를 촉촉이 적셔주시어 이 나이에도 돋보기 없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은혜가 아니겠는가.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시며 중학교 까지만 다니라며 공부 좋아 하는 막둥이의 희망을 막았지마는 늦공부의 즐거움을 갖게 해준 우리아버지의 고마움도 생각이 난다. 사랑하는 가족 간에는 슬픔도 아쉬움도 원망까지도 결코 잊기 싫은 고맙고 소중한 삶의 힘이 된다.

부모님의 음덕으로 생겨준 일남이녀 속 넓은 자식들과 건강한 네 손자 녀석을 가진 것 만 으로도 나에게는 분명히 더할 나위 없는 큰 복이다. 노욕 때문인지, 부모와의 추억은 나이가 들어보니 많을수록 보람이 되고 소중하다는 내 나름의 깨우침 때문인지 나는 유별난 자식과의 대화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로의 견해 차이를 대화와 애증으로 다듬어서 페루의 ‘쿠스코 12각 돌담’같이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맞추어져 어떠한 지진도 견디어낸 견고한 돌담 같은 가족관계를 어린애처럼 소망 해본다. 손자들이 가지고 노는 퍼즐게임처럼 가족모두가 하나씩 조각을 차례로 놓아 행복이라는 예쁜 그림을 짜 맞추기를 이 나이에도 기대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40대의 자식들과 70대의 나의 공감 대화가 참 즐겁다. 모처럼 집에 온 자식들이 집사람의 식사준비에도 아침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젊은 날이 생각이 난다. 벅찬 일과로 하루가 채워지던 30대 시절, 밤12시가 넘으면 통금(通禁)이 되던 시절에, 사무소인근 파출소에서 손바닥에 야근으로 늦어졌다는 확인을 받고 달빛을 벗 삼아 집으로 향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침이면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며 엉뚱한 생각에 젖곤 했다. 가벼운 교통사고라도 나서 하얀 병원 침대시트 위에 누어 딱 일주일만 뒹굴어 보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71세의 지금, 그때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타이트한 일정을 독서와 글쓰기, 산행 등으로 보내고 있음에도 잠깐 피로할 때는 있을지언정 항시 내일이 기다려지는 이 상황을 직장생활로 피로에 지친 자식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줄까 하는 점이다.

애써 몇 가지 차이를 생각해본다. 그때는 거의 정해진 일과를 시켜서 하였다면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적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몰입하며 스스로 한다는 점이 우선 차이가 있다. 나는 요즘 등산을 할 때에도 서서히는 가지만 거의 쉬지는 않는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산을 오르며 고운 꽃과 아름다운 단풍을 보며 피로를 잊듯 일상생활 속에서 지적호기심과 새로움이 주는 재미로 피로를 바로바로 푼다. 신문과 책속에서 삶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고운 꽃처럼 아기자기하게 다가온다. 사물과 사건을 보는 나와 다른 사람의 인식 차에 생기를 느낀다. 시련을 극복하고 어려움을 견디어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용기를 키운다. 소중한 사연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쉼 이상의 에너지를 주며 비타민제가 된다. 다툼에서 질 때는 새로운 배움에 의미를 두고 이길 때는 교만을 경계하는 지혜로 스트레칭을 한다. 신문이나 책속에서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많다는 걸 보며 위로를 받고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산책길의 솔방울하나 떨어진 낙엽들 에도 존재의 의미를 느끼며 다른 사람들의 유별난 취향이나 무리한 주장에도 열 받지 않으려 노력한다. “세상에는 울면서 강하게 사는 사람도 많다.”는 말 한마디에 결의를 다져 본다. “유머감각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과 차이가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이해도 해본다. 우리가 일에 몰두하는 것은 “먼 옛날부터 종교건 왕권이건 지배층이 부리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교묘한 술책” 이고, “순간의 기분에 따라 뜬금없고 맥락 없이 하루를 허비하는 것도 소중하다”는 말이 흥미롭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확립을 위해서는 때로 빈둥거려도 보고 무위도식도 해봐야 한다며, “행복해지려면 게을러 저라”는 철학자 러셀의 말에 위로받기도 한다.

모처럼 쉬는 날이고 집에 왔으니 깨우지 말자고 집사람이 말한다. 선친께서는 일본에서 노무자로 생활한 경험 탓인지 언제나 끼니때를 지키고 나쁘다하게 먹어야함을 강조하셨다. 그때는 나 역시 성찰하지 못했지 않은가. 무언가 아쉽고 측은한 마음에 깨우기가 망설여진다. 그런대로 나의 말을 경청하는 자식들이지만 독서생활이주는 피로를 잊는 이 충만감을 이번에도 설명 못하고 보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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