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바람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나무들은 미동도 없다.

간혹 술래처럼 숨죽이다 덜컥 나타나 수많은 잎을 떨게 하더니 오늘따라 깊은 잠에 빠진 듯하다.

나무들로 가득한 숲 속에는 길을 걷는 나의 낮은 발소리와 이따금씩 쪼르르 달려와 도토리를 줍고 사라지는 다람쥐들만이 부산할 뿐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과 구름이 씻은 듯 나를 반긴다.

아 ! 가을에는 내 떠도는 생각들을 받아주는 하늘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말없이 흐르는 구름은 자유롭고 멈춘 채 익어가는 숲은 고요하다.

내 몸은 땅에 있으나 마음은 이미 멀리 구름을 쫓아가고 있다.

끝 간 데 없이 푸른 하늘에서 어쩌면 숨 가쁘게 내 곁을 흘러간 긴 시간들과 미쳐 세상에 전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낼 듯 투명한 빛이 내린다.

태어나고 자라오면서 내가 만난 숱한 사람들, 또한 사랑했지만 이미 떠나간 사람들의 얼굴과 꼭 이루고자 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안타까운 시간들과 지금 내 앞에 다가와 있는 새로운 시간들,

그리고 먼 고향의 언덕길이 끝나는 신작로에 홀로 서있던 빛바랜 구멍가게도, 배들이 떠난 텅 빈 포구에 쌓이던 한낮의 권태로움도 스믈거리며 다가온다.

말없이 지나갔지만 문득문득 어렴풋한 풍경들과 이야기들은 가을과 함께 그리움으로 덧칠되어 돌아오곤 한다.

가을은 스스로 익어가기 위해 이미 지나간 일들을 끄집어내려 생떼를 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가을 햇살에 이끌려 한참을 걷다보니 집집마다 마당에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산촌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사람들은 빈 터에 집을 지으면서 담장 안으로 유독 감나무를 많이 심었다.

마당은 인간과 자연이 한 공간에서 동시에 호흡 할 수 있는 쾌적한 장소였다.
가지마다 감이 열리면 아이들의 훌륭한 간식이며 허기진 새들의 반가운 양식이기도 했다.
담장 밖으로 늘어진 감은 길을 지나는 목마른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다.

이웃과 자연과 함께 결실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가을이 주는 큰 선행이며 그것으로 인해 가을은 닫혀져있던 사람의 마음까지 열리게 한다.

마을 앞 삼거리에 이르자 벌써 텃밭에 나와 열심히 움직이는 병우 씨를 본다.
가을빛을 담고 있는 나무들을 배경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경건하다.

크지 않은 텃밭에서 보드라운 땅을 일구고 반듯하게 내어놓은 긴 고랑 사이로 다가서는 발걸음이며 씨앗을 심는 손길이 살가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한달 전에 심어놓은 배추는 벌써 손바닥보다 넓은 잎으로 자라나고 무와 파도 그들 곁에서 꿈을 꾸듯 자라고 있다.

그들의 자람에 용기를 얻은 농부는 오늘 또 다시 마늘을 심고 있다.
내년 유월이 되어야 수확 할 마늘이지만 땅 속에서 긴 시간을 견디며 자랄 씨앗을 생각하며 그 때 돌아올 수확의 기쁨을 미리 저장해 놓는다.

무엇하나 급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추운 겨울을 견디어야 온전한 결실을 볼 수 있기에 농부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고 염원하는 행복이란 것도 하나의 씨앗을 심듯 정성을 들이고 시간을 기다린 끝에 돌아오는 것을.....

길을 가다가 내 삶의 좌표를 잃었을 때 자연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편하고 안정적임을 믿는다.
내가 자연에서 배우는 것은 항상 그런 분명한 답이다.

자연을 따라하는 농부의 삶이란 얼마나 단순 명쾌하게 그려지는 그림인가?
적당한 에너지로 한 해를 살 수 있는 만큼의 농사를 짓고 놀이처럼 가꾸어놓은 무, 배추를 수확해서 한겨울을 날 수 있는 김치를 담근다.

한가해진 날 인근 남해에 가서 멸치를 사서 액젓을 담고 여수에 가서는 자잘한 조기나 새우를 사서 맛깔난 김치를 담근다.

한겨울엔 나무들처럼 모든 욕심을 버려둔 채 빈둥거리며 쉬는 그것이 인생이다

나는 지금도 산촌에 살면서 생각해본다.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한평생을 긴장하고 치열하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큰 욕망을 버리고 편하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러나 확신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우리가 누려야 할 그보다 더 중요한 것, 귀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단 한 번 살다가 떠나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란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매번 엉뚱하고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가을 속에는 우리에게 잊혀지고 잃어버린 것들이 속속들이 돌아온다.
가을이 인간을 일깨우는 스승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간 잃어버리고 지나친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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