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똑같은 물방울이 빛의 굴절에 따라 여러 색깔로 보여 지며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고, 비온 뒤 선명해진 시야가 고즈넉한 산마루를 새삼스런 모습으로 보여주듯, 때로는 사물과 세상사 이치는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다. 누군가는 “세상을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고도 한다. 희극과 비극 즉 기쁨과 슬픔은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사람 사는 모양새에 따라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고, 두 원이 합해지며 ‘교집합’의 영역이 생기듯 공존과 보완의 영역으로 인식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생각을 보태며 ‘사유’해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지혜를 비극에서 찾았다. 희극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며 남근(男根)을 주제로 하는 외설적인 내용이나, 보통 사람들보다 못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어색한 행동이나 언어로, 바람직한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 장애가 되는 고착화된 행동을 보여주며 웃음을 선사하고, 용서와 관용을 일깨우며, 행복한 결말 즉 멀리 보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비극은 왕이나 영웅 등 숭고한 인물을 등장시켜 자발적 의지로 특정한 인물, 운명, 환경에 맞서 장열하게 싸우다 끝내 패배하고 마는 심각한 이야기를 다룬다. 관중들은 나보다 출중한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을 보는 간접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과 슬픔을 해소(카타르시스)하고, 동정과 연민을 느끼고, 감성을 나누며 삶의 지혜를 터득한다. 비극의 대표작인 BC 427년에 소포클레스에 의해 쓰여 진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 주어진 슬픈 운명 앞에 스스로 칼로 두 눈을 찌르고 방황으로 삶을 마감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결을 하고, 딸 안티고네는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으로 묘사된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이후 예술 전반이 급격히 쇠퇴하며 소위 암흑기를 맞은 유럽은 10세기경 연극계도 비극의 공연이 불허된다. 연극은 천지창조 등을 주제로 한 ‘신비극’이나 예수의 기적을 다루는 ‘기적극’등 20여분 안팎의 에피소드 40여 편을 묶은 순환극 형태의 종교극만이 허용된다. 시간이 흘러 잉글랜드의 왕 헨리8세가 앤 불린과의 사랑을 위한 부인 캐서린 과의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과 결별하며 성공회를 세우게 되고.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극을 멈추고 다시 비극 등의 공연을 허용한다. 유럽인의 비극에 대한 참았던 갈증은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내며 마침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절정을 이룬다. 다만 그리스의 비극이 운명비극이었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리어왕’의 오만함, ‘맥베스’ 장군의 야심, ‘오셀로’ 장군의 의심, ‘햄릿’ 왕자의 우유부단함 등 성격적 결함이 비극을 이끄는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문명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지만 문화는 그렇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유머는 국경을 넘으면 통하기 어렵다.”는 말도 있다. 모든 민족이나 집단은 살 붙이고 살아오면서 서로 다른 고유한 신화, 전설, 민담, 환경 등을 오랜 세월 지키고 키워오며 조금은 결이 다른 정체성과 문화와 서사를 만들어냈다. “나는 생각 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유럽인들은 도전과 고뇌를 통해 지혜를 깨우치고 미래를 개척한다면. 우리나라의 판소리계 대표 소설인 ‘춘향전’이나 ‘심청전’, ‘흥부전’을 보면 몇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우선 그 주인공이 영웅도 아니지만 보통 이하의 사람도 아니다.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며 일반 백성이다. 우리조상들은 우선 현실의 고달픔을 서로 위로하며 견디기 위해 춤과 노래와 언어유희를 통해 웃음을 주고받으면서도 때론 날카로운 풍자로 권위를 조롱하고, 항시 권선징악과 해피엔드로 선한 백성으로서의 삶속에서 신의 가호를 소망해왔다.

삶의 기복(起伏)으로 멀미가 날 때는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처럼 시야를 한사코 멀리 두라한다. 흔들림에 몸을 맞기며 그러려니 하며 맷집을 키워보라고도 한다. 고소공포증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번지점프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어릴 적 단 것을 좋아하다가도 나이를 먹을수록 발효음식의 깊은 맛을 즐기고, 쌉싸름한 씀바귀나 고들빼기를 즐기기도 한다. 삭힌 홍어, 중국의 취두부, 유럽의 특수한 치즈 등 여러 식품들이 별미 또는 혐오음식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슬픔은 어떤 지혜와 노력으로도 “메우기 힘든 패인 고랑”이라지만 조금은 견디어볼 ‘해석’은 없는 것일까? “책이 몸을 통가하면 고통을 해석하는 힘이 생긴다.“는 말하나가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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