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아침마당-도전! 꿈의 무대’ 출연해 기구한 인생사연 밝혀

‘한사람’과 ‘착한당신’이라는 타이틀곡으로 3년째 활동중인 울보가수 김재연씨의 사연이 지난 23일 방영된 ‘KBS 아침마당-도전! 꿈의 무대’를 통해 공개되면서 많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낳아주신 어머니를 찾기 위해 전국 각지의 무대를 누비며 울며 노래하는 김재연씨, 생모와의 만남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가 방송국에 보낸 사연 전문을 소개한다.

혹시라도 김재연씨 생모와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는 시민이 있다면 광양시민신문 혹은 김재연씨(010-5367-8598)에게 연락해주시길 바란다.

▲ 울보가수 김재연씨

안녕하세요, 저는 울보가수 김재연입니다.

저에게는 두 분의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낳아주신 어머니와 길러주신 어머니가 따로 있다는 사연이 비단 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낳아주신 어머니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입양아인 것도 아닙니다.

제가 처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한 친구가 무심코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재연아! 니 주워온 새끼다!”

저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시덥지 않은 소리라고 고개를 내저었지만 눈시울이 시뻘게 졌습니다. 들녘 논두렁을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친구들의 어머니에 비해 이미 할머니에 가까웠던 어머니에게, 저는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엄니, 나 주워 왔다매? 나 주워 왔대?”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한참 후 깊은 한숨과 함께 제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제 위로는 누나만 여섯 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산에서 약초를 캐어 각종 환을 만들어 사람들을 치료해 주던 일종의 의원이었습니다. 비록 제대로 된 면허나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조제해 준 환들은 효과가 좋아서 정식 의원이나 병원에서 치료 못한 환자들도 치료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발가락부터 하반신까지 궤양이 생겨 살이 썩어가는 젊은 여자가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여자에게 “내 아들을 낳아주면 책임지고 치료를 해주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나이 쉰이 넘은 영감이 시집도 안간 처녀에게 치료를 조건으로 아들을 낳아달라고 했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요. 여자와 같이 온 할머니는 ‘노망난 늙은이’라고 욕을 퍼붓고는 그냥 떠났다고 합니다.

1년쯤 후 그 여자는 아버지의 집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미 궤양이 하반신 전체로 번져 사타구니까지 썩어가고 있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내 아들을 낳아주면 치료를 해주겠다”고 했고 자신이 조제한 환약으로 치료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스물일곱, 꽃 같은 처녀는 아이를 낳고 이틀 후 말없이 집을 떠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저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셈이지요.

그날부터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는 젖동냥을 하면서 저를 키웠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항상 고무젖꼭지를 물고 살았다고 합니다. 넉넉하지 못한 시골 살림에 젖꼭지는 너무 귀했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기르는 개가 젖꼭지를 먹어버려 개를 묶어놓고 대변에서 젖꼭지를 찾기도 했답니다. 삶아서 저에게 다시 물리기 위해서였지요. 동네를 돌아다니시며 젖동냥 하기는 예사였습니다. 그럴 때면 주인집 큰 아들이 눈을 흘기며 작대기를 휘두르곤 했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세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살림과 육아는 혼자 남겨진 어머니의 몫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낳지 않은 저를 위해 연로하신 몸에도 헌신을 다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생활이 순탄할 리 없었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한 번도 기성회비를 제 날짜에 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기성회비를 안냈다며 쫓아내기 일쑤였습니다. 중학교를 다닐 때는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돌고 돌아야 했습니다.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땀범벅이 된 몸으로 학교에 도착하면 오전 수업은 끝나 선생님에게 또 꾸지람을 들어야 했습니다.

친구들 나를 놀리는 게 일이였고 따돌림은 당연했지요.

저를 낳고 이틀 만에 집을 나갔던 어머니가 딱 한번, 제가 살던 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네 살쯤이었는데, 길러주신 어머니는 아들을 보러온 생모를 위해 당시 우리 지역의 특산품인 꼬막과 쌀, 콩 등을 싸서 가지고 가라고 뜰방(토방)에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 제가 “저런 여자한테 왜 이런 걸 주느냐?”며 흩어 버렸다고 합니다. 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길러주신 어머니가 제에게 해주신 생모와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저 어린것이 모질게 하는디, 담에 크면 원망 할거라고 다시 오지 않는다’고… 그게 마지막이였답니다.

제가 장성해 결혼을 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무렵이었습니다.

“이제 니 생모를 한번 찾아 같이살지 않겠냐?”

어머니께서는 저의 출생의 비밀부터 그 동안의 사정을 상세하게 들려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생모의 모습은 단 한마디였습니다.

“키가 크고 얼굴도 희었어야.”

생모를 찾아서 같이 살자는 어머니의 말씀에 저는 화부터 냈습니다.

“어머니! 저는 두 분은 같이 못 모셔요. 두 분을 모시고 살다보면 한 쪽은 서운할 수밖에 없어요.”

어려운 살림 속에서 저를 거둬 길러주신 어머니에 대한 의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1996년 길러주신 어머니가 세상을 뜨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저에게도 많은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12년이나 생계의 터전이었던 사진관에 불이나 사업이 파산하였고 새로 시작한 식당도 한동안 호황을 누리다 2002년 갑작스런 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학교 가는 아이들에게 천원 한 장 줄 수가 없었습니다. 살고 있던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자 항상 죽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이면 길러주신 어머니의 사진을 가슴에 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버지도 없이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 살아왔던 제 모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죽는 수밖에 없다, 죽어야 한다.’

자살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TV위에 있는 사진 두 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찍어둔 딸과 아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의 사진들이었습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저 아이들을 또 애비 없는 자식으로 놀림 받으며 살게 할 수는 없다. 그래, 죽을 마음으로 살아보자.’

죽으러 가기로 했던 걸음을 택시회사에 근무하던 친구에게로 돌렸습니다. 영업용 택시기사를 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정을 알 리 없는 친구는 저를 설득했습니다. ‘넌 자존심이 강해서 못한다,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살아온 넌 절대 영업용 택시 못한다.’ 저의 끈질긴 고집에 친구는 1개월만 연습 삼아 해보라고 했고 저는 한 달 후에 영업택시면허를 땄습니다. 한 달도 못 버틸 거라는 친구의 걱정과 달리 저는 죽기 살기의 마음으로 잠을 잊고 일을 했습니다.

3개월 지난 어느 날 새벽에 집에 들어간 저는 몇 만 볼트 전기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마비가 되면서 화장실에서 쓰러졌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가고 깨어난 난 또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픈 몸을 돌볼 틈도 없이 억척스레 일을 하고 뇌출혈이었다는 것은 한참만 알았고 내 몸을 치료 하기 위해 침 뜸을 배웠답니다. 그리고 봉사자가 되었답니다. 전국으로 침뜸 봉사를 다녔습니다. 어느덧 신용불량의 인생도 법원개인회생으로 회복해 이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월은 무상하게 흘러 머리가 희끗해지자 가슴 속에 그리운 얼굴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채울 수 없는 헛헛함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제 생모, 엄마를 찾고 싶습니다. 성씨도, 이름도 모릅니다. 다만 사연만 가지고 찾아 합니다. 저를 낳을 당시 27세 정도였고,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다는 것. 어머니가 치료를 위해 찾았던 곳은 당시 광양군 골약면 황곡리 금곡(사박골)마을입니다. 현재 어머니의 연세는 85세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낳아주신 어머니를 찾을 수 있다면 한이 없겠습니다. 너무 늦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엄마 사랑합니다. 못난 아들이 꼭 한번만이라도 뵙고 싶습니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