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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나무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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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18  10: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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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며칠 전부터 팽나무 잎이 물들기 시작했다. 나무의 끝자락 가지에서부터 시작된 잎들의 변화는 점차 가파르게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나무 뒤편에는 티끌없는 하늘이 선명했고 그 가운데로 새들이 끼룩 끼룩 어디론지 날아가고 있었다. 산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목에서 한줄기의 연기가 오르고 새들이 사라져간 숲에서는 타오르듯 가을이 진동하고 있었다. 변화의 중심에는 팽나무가 있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부터 나는 팽나무의 잎이 언제 변할 것인지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팽나무가 물든다는 것은 마을이 완연한 단풍 속에 잠긴다는 신호였다.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것처럼 가슴이 뛰는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산촌에서 누릴 수 있는 큰 기쁨이기도 했다.


그는 단지 한 그루의 나무에 불과했지만 그가 계절 따라 몸을 바꿀 때마다 마을의 분위기도 내 마음도 새로워지곤 했다. 봄이면 모든 새싹들이 서둘러 얼굴을 내밀어도 그는 좀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혹시 우리 곁을 떠나려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일기도 했지만 그는 어느 날 약속을 지키듯 얼굴을 내밀곤 했다. ‘서둘지 마라 천천히 이루는 것이 참된 것이다.’


고목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그 순간만큼은 소름 끼치도록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가을이면 사람들은 안마당의 감들이 아무리 쏟아질 듯 매달려도 앞산의 작은 나무들이 아무리 화려하게 물들어도 진정한 가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다리던 팽나무가 노랗게 물드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깊은 가을을 느끼곤 했다. 산더미처럼 쌓여진 노란 잎들 아래에 서면 내 얼굴마저 그렇게 물들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오랜 된 나무가 이루어내는 하나의 걸작 속에는 아름다운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팽나무의 기억 속으로 스러져간 거친 시간들과 안타깝게도 이루지 못했던 꿈들과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춤을 추며 반갑게 감응하는 모습도 어른거렸다.
오랜 세월을 견디어오고 있는 팽나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였고 신비였다. 무려 350 년 동안 그는 줄곧 한 자리에 서있었기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마을의 절대자였다. 마을을 이루며 살던 세상 사람들이 바뀌고 풍경이 바뀌어도 그는 외롭지만 늘 의연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가지들이 뻗어나간 먼 곳으로 끝없이 이어진 생명력과 무성해진 숲에서 그가 살아온 아득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나무의 마음속을 헤아릴 수 없지만 그를 바라보면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것들이 마음을 건드리곤 했다. 그를 통해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던 과거의 나를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팽나무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 네가족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그를 만난 것이 큰 행운처럼 느껴졌다. 넓은 시냇물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그 한가운데에 도드라지듯 솟아있는 나무는 얼핏 보아도 매우 기품이 있어보였다. 우람한 몸에서 풍겨 나오는 든든함과 일가를 이루듯 사방으로 흩어진 가지들마다 내민 잎들로 인해 그가 품고 있는 마을도 더불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때는 마을의 모든 것이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풍요롭다는 것은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삶을 그렇게 칭하는 것이 아닐까? 도시에서 보이지 않았던 아니 쉽게 볼 수 없었던 그런 것들이 훤히 보였다. 언제나 푸름을 호흡하며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땀 흘리는 노년을 꿈꾸는 허울뿐인 대도시의 팍팍한 인생살이에 비하면 자연과 함께하는 산촌 사람들이 얼마나 값진 삶을 살고 있는지 놀랍기도 하고 한편 부럽기도 했다. 자연과 인간이 마음을 교류하며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근사한 일이었다.
이전에 어떤 유혹에도 동하지 않던 우리 가족 모두를 움직였으니 대단한 나무임이 틀림없다.

팽나무를 처음 만나면서 나를 가장 끌어당겼던 것은 힘이 부칠 때마다 나를 내려놓을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믿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때의 믿음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오고 있다.
나날이 단풍이 맵시를 더하는 요즘 팽나무를 곁에 두고 시시때때로 바라볼 수 있어서 내 삶이 더 근사해지는 것 같다. 그가 튼튼하게 살아있는 한 앞으로의 인생도 더 풍요로워 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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