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자 광양시 정의당 지역위원장

올해처럼 농사가 힘든 적이 또 있었을까? 라는 어느 농부의 탄식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봄 부터 감자, 양파, 마늘, 보리까지 가격이 대폭락 하더니 그 뒤를 이어 먹노린재, 총채벌레 같은 병해충이 맹위를 떨치기도 했다. 그 기세를 목도열병이 이어 받아 가을 들판을 휩쓸어 버리더니 급기야 세 차례의 태풍은 무심하게도 겨우 남아있는 희망을 훑고 지나가버렸다. 들녘의 쓰러진 벼이삭은 3분의 1이라는 수확량으로, 낙과되어 바닥을 뒹굴던 과일은 과수원 농장주의 자살로, 잦은 비에 물러버린 밭작물은 수확포기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풍요롭고 여유로워야 할 가을들녘은 어디에 있을까? 농업현장은 농부들의 탄식과 자조로 뒤범벅이 된 채 여전히 들썩거리고 있다.


설상가상이다. 지난 10월 25일 홍남기 경제 부총리가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선언이라는 비보를 통해 농업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1995년 세계자유무역협정(WTO)에 가입한지 25년 만에, 지난 2월 미국정부가 공개적인 압력을 가한지 94일 만에 백기 투항을 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G20 회원국, 세계무역량의 0.5%를 차지하는 국가 등 총 4가지 개도국 지위 제외 요건을 모두 충족했기 때문에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는 명분이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이었기 때문에 고율관세로 인한 농산물의 수입가격 통제는 물론 농업 보조금을 통해 농업의 기반이나마 지켜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체제는 무너졌다. 더욱이 서러운 것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농민을 철저하게 투명인간 취급한 일이다. “당장 농업에 미치는 피해가 없다”는 말로 강변하는 그들은 피해 대책을 세우겠다거나 농업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했다. FTA 체결 때마다 던지던 레퍼토리를 다시금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염치도 책임감도 없는 문재인 정부는 생명산업과 식량주권이 벼랑 끝에 다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미국정부의 압력을 피해 방위비 분담협상에서 한숨을 돌리고 자동차와 공산품등의 안정적인 수출기반을 확보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이것은 곧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국익과 경제논리를 앞세워 농업과 농민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등외국민 취급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도국을 포기한 결과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현재 1조 4900억 규모인 농업보조총액(AMS)이 절반으로 깎이며 각종 농업보조금 정책이 대폭 후퇴 할 것이다. 때문에 가장 큰 피해자는 쌀 생산 농가가 입게 된다. 고율관세가 사라질 경우 현재 513%인 쌀, 고추 등을 민감 품목으로 지정해도 쌀 수입관세가 394%~154%로 떨어질 수 있다. 그만큼 외국산 쌀이 쉽게 국내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요 양념류인 고추는 현행 270%에서 207%로, 마늘은 360%에서 276%로, 양파는 135%에서 104%로 관세가 낮아진다. 이럴 경우 중국산 농산물이 우리 시장을 휩쓸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이는 축산물에도 예외는 없을 것이기에 결국 국내 농업은 요동치고 가격 경쟁력을 갖춘 외국산 농산물이 소비자들의 밥상을 점령할 것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마른 들판의 불씨처럼 미친 듯이 퍼져나가 농민들에게 또 다른 아픔을 안겨주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농업문제 직접 챙기겠다”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개도국 지위 포기선언을 철회해야 한다. 그리고 농민을 위한 임시방편의 대책이 아닌 근본대책을 다시 세워야한다.


먼저, 농업생산 기반 유지와 농민 기본소득 보장을 해주어야 한다. 현재 2.98%(연간 15조 3000억 수준)에 머문 농업예산을 4%로 늘려 종잣돈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600억대에 머문 농어촌 상생 협력기금을 1조원 규모로 확충하여 공익형직불제 예산 3조를 확보해야 한다.


다음으로 국민을 위한 건강한 먹거리 기본권을 확립하는 것이다. 취약계층을 위한 농식품바우처 사업이나 임산부를 위한 친환경 꾸러미, 아동청소년을 위한 과일간식 아침급식 확대제공, 로컬 푸드 소비기반 확대 등의 안정적인 공급체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또한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조성을 위해 기초농산물 ‘수입보장보험’과 가격손실 보장 제도를 만들고 농작물 재해보험도 전면 개편해야 한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청년창업농과 귀농, 후계농을 위한 최소 5년 이상의 지원정책도 필요하다. 이에 하나를 더하여 행정과 의회, 농민과 소비자 단체, 학계 등의 인적 자원을 동원해서라도 농정혁신안을 마련하기 위한 TF팀을 만들어 내야 한다. 분명 예산이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묻겠지만 불필요한 소모성 예산, 다발성 복지예산을 줄여 그 감축분을 통해서라도 농정 혁신에 힘을 실어줘야 할 때이다. 그래야만 농업을 직접 챙기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이 지켜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잠시 보류 되어 있는 WTO 차기 협상을 통해 농민의 한숨이 줄어들 수 있는 노력을 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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