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기의 지랄발광 이야기

▲ 정채기 강원관광대학교 교수
‘과거가 없는 현재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 없다.’는 불변의 논리를 전제로 한다면 인류역사와 더불어 출발해 현재까지 누적된 아버지와 남성의 잘못된 역사 바로 세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 불가능을 빌미로 미래의 발전조차 꾀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의 내일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천만다행으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보다 나은 아버지의 신화 아니 역사를 위하여 현재 부단히 애쓰고 있는 우리 모두의 노력들을 통해 미래 발전의 청신호를 느낀다. 이제 새로운 아버지의 신화를 나열해 보려고 한다.

칼 융은 ‘문화란 인간 내부에 있는 동물적인 본능을 길들여가는 일이다’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길들여가는’의 의미일 것이다. 전체 문맥상에서 조금 비약을 해보면 ‘인간의 문화란 동물적인 본능을 그대로 표방하는 것이다’ 혹은 ‘우리 문화란 동물적인 본능을 순화시키는 것이다’의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인간의 문화(생활양식)가 후자이거나 그것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는 다른 사람들도 큰 이의가 없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입만 열었다 하면, 동물을 포함한 ‘만물의 영장’임을 외쳐대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남성들에게 묻노니 혹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그 어떤 것들, 예를 들면 권력·지배·명예·제물·인기·소유·우월감·승리·쾌락·쟁취 따위들 때문에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논리가 철저히 지배되는 동물들의 세계와 흡사하다 못해 똑같은 총체적 연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그러나 우리는 동물이 아닌 공존공생의 원리가 적용되어야하는 인간이므로 이를 철저히 부인해야 한다.

아버지를 뜻하는 한자어 ‘父 ’와 관련된 것으로 ‘父子有親(부자유친)’이라는 오륜의 하나가 있다. 이는 삼국시대 사람들의 덕목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도리는 친애(親愛)에 있다. 즉 아버지는 아들을 귀여워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잘 섬김으로써 그 사이에 진정한 정이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 위인의 한 분인 정약용 선생은 가족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자상했다고 한다. 유배 생활지에서조차 인편으로 거의 매일 집에 서신을 보내 가족의 근황과 안부를 묻고 자신의 소식을 알렸다.

우리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많이 남겨주긴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것 또한 많다. 부자유친의 메시지대로 하라. 그리고 정약용 선생만큼은 아니라도 최소한 흉내는 내자. 우리의 선조는 곧 현재 그리고 미래의 우리가 될 수 있으니 신토불이의 슬로건 아래 자신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라.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은 그 숫자만큼이나 천차만별이다. 비슷한 연령의 아버지·남편들이 아내와 자녀들에게 보이는 의식과 태도들이 정말 다양함을 느낀다. 30대 초반에 해당하는 여러 유형의 아버지들을 보자.

첫 번째는 부인도 직장생활을 하는 집에서 유감스럽게도 부인과 똑같은 가사 일을 하거나, 전혀 도와줄 생각도 없는 ‘세상 거꾸로 사는’ 내 후배의 남편(가장)이 그 경우이다.

두 번째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내 아이를 데리고 놀러간 어린이박물관(실내 놀이터 겸용)에서 만난 아버지들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아버지들(데리고 온 아이들이 우리 아이와 비슷했기 때문에)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아내와 같이 아니면 자기 혼자서라도 아이들에게 마치 친구처럼 대해 주며 놀아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실내 놀이터 구석에서 자고 있는 아버지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니(그때는 정말 아니었지만) 설사 구석에서 잤다 하더라도 거기까지 온 것만도 얼마나 장족의 발전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 더 잔인하게 잠자는 당신들, 극성인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여기 온 것인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왔는데 너무 피곤해서 잘 수밖에 없는지 묻지는 말자(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지랴!). 그들 중에서 특히 인상 깊게 우리 모두의 가능성을 보여준 아버지들이 누구인고 하니, 아이들과 함께 기꺼이 정말 즐겁게 놀고 있는 (몇 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었다.

졸거나 잠자고 있는 구석의 아버지들을 속으로 비난하는 사이에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아버지들의 눈높이는 어느새 상대편들과 맞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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