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 교토편] 도시샤 대학 교정 내 윤동주 시비-

▲ 김보예 쓰쿠바대학교 교육학 박사과정수료

현대시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여론조 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시는 시인 1위로 윤 동주가 꼽히었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 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29세의 꽃다운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2월에 태어나 2월에 눈을 감은 윤동주. 어쩌면 1월은 그 에게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하늘 속 별이 바람 에 스치우는 그런 달인 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1 월에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학창 시절을 보낸 도 시샤 대학(同志社大學, 일본 교토에 있는 미션 스 쿨)을 찾았다.

▲ 도시샤 대학(이미데가와 캠퍼스) 서문, 사진제공=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윤동주 시비(詩碑)는 도시샤 대학의 이마데가 와(今出川) 캠퍼스에 세워져 있다. 지하철 이마데 가와 역 3번 출구에서 나와 도보 1분 정도 걸으 면 도시샤 대학 서문이 나온다. 서문은 윤동주 시 비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교문이기도 하다. 서문 에 들어서면 왼쪽에 빨간 벽돌로 된 채플이 보인 다. 송우혜(1998)의 <윤동주 평전>에 의하면 도 시샤 대학의 채플은 1930년대에 일본 전국에서 두 대밖에 없었던 파이프 오르간 중 한 대를 보유 하고 있었다고 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윤 동주는 도시샤 대학 재학 시절 채플을 자주 오갔 을 것이다.

▲ 도시샤 대학(이미데가와 캠퍼스) 서문, 사진제공=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한국·북한·일본을 하나로 잇는 시인 윤동주

윤동주 시비는 캠퍼스 내 메인 거리에서 왼쪽 즉, 채플 방향으로 꺾인 서브 거리에 설립되어 있 으며, 시비는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 윤동주 시비 의 설명문에는 ‘윤동주는 코리아의 민족시인이 자 독실한 크리스천 시인이기도 하다’라는 문구 가 적혀있다. ‘코리아의 민족시인’. 당연하면서도 거리감이 있는 표현이다. 이원종(2019) <同志社大学における尹東柱詩碑建立の経緯と意義-ワンコリアの夢と新島精神の遭遇->(도지샤 대학의 윤동 주시비건립의 경위와 의의-원코리아의 꿈과 신 도정신의 조우-)에 의하면, 윤동주는 남북에서 인정받고 있는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 라고 한다.

▲ 도시샤 대학 내 시인 윤동주 시비, 사진제공=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1995년, 도시샤 대학에 윤동주 시비를 설립할 당시 남북의 학생들이 힘을 모아 시비를 설립하 였으며, 한반도를 칭하는 어휘로 ‘코리아’를 선택 한 것이다. 그래서 윤동주 시비의 오른쪽(남쪽)에 는 대한민국의 국화 무궁화가, 왼쪽(북쪽)에는 조 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상징화 진달래가 심어져 있다. 그리고 시비 앞(서쪽)에는 윤동주가 마음의 위안으로 삼았을 채플이, 시비로 들어오 는 길목에는 일본의 상징화 벚꽃이 심어져 있다. 이원종(2019)은 시비에는 윤동주를 통해 한국, 북 한, 일본이 우정어린 교류로 서로의 마음이 하나 가 되길 바라는 바람이 담겨있다고 전하였다.

▲ 도시샤 대학 내 시인 정지용 시비, 사진제공=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冬(동)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마리 鯉魚(잉어)

윤동주 시비의 옆에 보면 시인 정지용의 시비 가 설립되어 있다. 그 옆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연못 속에는 잉어가 살고 있다. 정지용 시 인은 윤동주를 겨울에 피는 꽃과 차가운 얼음 아 래를 유유히 헤엄치는 한 마리의 잉어에 비유하 였다. 연못은 정지용 시인의 시적 표현을 상징화 하여 만들어 놓은 듯하였다.

정지용 시인은 도시샤대학의 영문학을 졸업한 윤동주의 선배이자, 윤동주가 북간도에 있을 때 부터 존경하고 좋아했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지용 시인에 대한 윤동주의 마음은 특별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윤동주에게 연희전문학교 시절 4총사(윤동주, 송몽규, 강처중, 정병욱)로 불리는 친우가 있었다. 해방 후, 친우 강처중은 정병욱이 어머니께 보관 을 부탁한 윤동주의 육필 원고(연희전문학교 시 절에 적은 시)와 일본 유학 시절 윤동주가 자신에 게 보낸 5편의 시, 그리고 그 외의 윤동주의 습유 작품(拾遺作品)을 모아 총 31편의 시가 담긴 윤 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발행을 진행한다. 윤동주의 시집 제목은 윤동주 의 육필 원고의 제목이자 졸업 기념 자선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그 대로 땄다.

▲ 정지용 시집을 선물 받고 좋아하는 동주, 사진제공=Naver 영화 동주

1948년 1월 간행된 초판 시집 『하늘과 바 람과 별과 詩』에는 윤동주가 존경했던 정지용 시인이 서문을 쓰고, 동기 강처중이 발문을 달 았다. 서문을 연희전문학교 은사인 이양하 교수 (1904~1963)가 아닌 정지용 시인에게 부탁한 것 으로 보아, 살아생전 윤동주가 정지용 시인을 각 별히 좋아했던 것 같다. 윤동주는 <정지용 시집> 을 소장하게 된 날짜 1936년 3월 19일을 시집 내 지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숭원(2016) <정지용 시가 윤동주에 미치는 영향>에 의하면, 1938년 이전의 윤동주의 습작시에는 정지용 시인의 영향 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를 기 억하지 못했다. 당시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의 선 망의 대상이었던 정지용 시인이었기에, 그에게 윤동주는 스쳐 가는 인연에 불과했던 것 같다. 송 우혜(1998)에 의하면 1939년 10월에 윤동주와 함께 정지용 시인을 찾아뵀다는 라사행 목사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는 살 아생전에 서로 만나지 못했던 것으로 단정되어 왔다. 왜냐면 정지용 시인이 쓴 서문에는 그가 윤 동주를 전혀 모르는 것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내가 詩人(시인) 尹東柱(윤동주)를 몰랐기소니

尹東柱(윤동주)의 詩(시)가 바로 “詩(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虎皮(호피)는 마침내 虎皮(호피)에 지나지 못하 고 말을 것이나,

그의 “詩(시)”로써 그의 “詩人(시 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시인 정지용 서문 中, 1947.12.28 –

초판 간행 이후, 1955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 과 詩』의 증보판이 간행되었다. 증보판은 낸 시 기는 6.25전쟁이 끝난 직전으로 남과 북의 이념 이 강하게 부딪히는 시기였다. 때문에, 증보판에 는 월북한 정지용 시인의 서문과 남로당(남조선 노동당)의 거물이었던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 고, 윤동주 시만 홀로 우리 곁에 오게 되었다.

당신의 흔적이 꽃이 될 예정입니다

도시샤 대학 교정 내 윤동주의 시비는 1년에 약 2만 명 정도의 추모객이 방문하고 있다. 지금 까지 취재하러 다니면서 사람의 온기를 따스하게 느낄 수 있는 역사의 발자취였다. 추모객들이 한 마디 한마디 남긴 추모노트는 출판 서적으로 발 행 추진 준비 중이다. 소중한 마음과 마음이 모여 남긴 흔적은 冬(동) 섣달의 꽃이 될 예정이다.

두꺼운 얼음 아래 차디찬 강물 속을 유유히 헤 엄치는 한마리의 잉어 같은 당신이 머문 곳에는 늘 冬(동) 섣달 꽃이 피길 바란다.

▲ 도시샤 대학 내 시인 윤동주 시바를 방문한 추모객들이 남긴 추모노트, 사진제공=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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