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 후쿠오카편①] 시인 윤동주가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

▲ 김보예 쓰쿠바대학교 교육학 박사과정수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序詩>(서시), 1941.11.20.-

시인 윤동주 추모식이 열리는 ‘모모치 서쪽 공원’

하늘·바람·별. 동화 같은 어휘로 애잔하게 마음을 울리는 서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죽어 가는 것을 사랑하고자 했던 시인 윤동주. 그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나는 별이 된 윤동주의 마지막 숨결을 찾아 후쿠오카를 방문했다. 매년 일본에서는 윤동주 추

모식이 열린다. 윤동주의 서거일인 2월 16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말에 도쿄의 <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교회)>, 교토의 <詩人尹東柱を偲ぶ京都の会(시인 윤동주를 추모하는 교토회)>, 후쿠오카의 <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후쿠오카・윤동주시를 읽는 모임)>에서 추모식을 추진하고 있다. 작년 2월, 나는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윤동주 추모식에 참석하였다.

▲ 후쿠오카에서 열린 윤동주 추모식 / 사진=김보예

매년 2월 중순, 후쿠오카에서는 유명 K-POP 스타들의 콘서트로 호텔 잡기가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잡은 게스트하우스도 K-POP 스타의 공연을 보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팬들로 시끌시끌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중 단 한 명도 윤동주 추모식에서 만나지 못했다.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순간이었다.

후쿠오카에서 진행되는 윤동주 추모식은 윤동주가 숨을 거둔 후쿠오카 형무소 바로옆에 있는‘모모치 서쪽 공원(百道西公園)’에서 매년 진행된다. ‘모모치 서쪽 공원’은 후지사키역에서 도보 6분 거리에 있다. 후지사키역은 하카타역에서 지하철로 15분(직통)뿐이 걸리지 않는다. ‘모모치 서쪽 공원’은 바로 뒤편에 현재 후쿠오카 구치소가 자리 잡고 있다.

▲ 모모치 서쪽 공원과 후무오카 구치소 / 사진=김보예

윤동주는 어디에 수감 되어 숨을 거두었을까?

종종 과거의 후쿠오카 형무소가 현재 후쿠오카구치소로 이름만 변경되었다고 생각하여, 후쿠오카 구치소 앞에서 묵례를 드리는 분들이 계신다.

그리나 후쿠오카 형무소는 구치소보다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형무소 터는 운동장과 아파트단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후쿠오카·윤동주시를 읽는 모임)>의 대표 마나기 미키코(馬男木 美

喜子)씨의 설명에 의하면, 운동장에서부터 쭉 연결된 콘크리트 벽이 과거 후쿠호카 형무소의 흔적으로 보인다고 설명하였다. 끝이 보이지 않은 콘크리트 벽은 과거 후쿠오카 형무소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 모모치 서쪽 공원과 후무오카 구치소 / 사진=김동준
▲ 모모치 서쪽 공원과 후무오카 구치소 / 사진=김보예

윤동주의 죄명은 ‘조선 문화 유지 향상’

윤동주는 무슨 죄명으로 체포되어 복역하게 된 것일까? 윤동주의 죄명은 일본어가 아닌 조선

어로 시를 쓴 죄로, 조선 문화의 유지 향상에 힘썼다는 것이다. 송우혜(1998)의 <윤동주 평전>은 『特高月報(특고월보)』(일본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발행의 특고경찰 기록) 1943년 12월치와 『思想月報(사상월보)』(일본 사법성 형사국 발행의 법원 기록) 제 109호(1944년 4·5·6월치)를 바탕으로 윤동주의 혐의를 밝히었다.

윤동주의 죄는 연희전문학교 시절 조선 문학잡지 출판을 모의한 것부터 시작되며, ‘민족의식유발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그가 조선어로 시를 쓰고 조선어로 된 시집을 출판하고자 했던 움직임은 아주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가 죽어가는 조국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포스터_연희전문학교 시절 시를 쓰는 윤동주사진=Naver <영화 동주> 스틸것

<영화 동주>에서는 다카마쓰 고지 교수의 소개로 알게 된 가상의 인물 쿠미의 도움으로 ‘자신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영어로 이중번역하여 미국에 시집을 출판하고자’하는 윤동주의 모습이 픽션으로 그려진다.

이 설정은 이준익 감독의 결정적인 제작 판단 미스라 볼 수 있다. 윤동주의 시가 문학적 가치를 넘어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개인의 명예를 위해 시인으로서 고군분투한 점이 아닌, 죽어가는 조국을 위해 펜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된 설정은 영화의 완성도에 있어서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영화 동주>에서는 특고 형사에게 잡하기 직전에 시집의 제목을 정하지만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 출판하려고 했던 자선시집의 제목이다.

맨 처음에는 자선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적은 ‘서시(1941.11.20)’의 영향으로 윤동주는 자선시집의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로 변경한다. 만약 윤동주가 ‘서시’를 창작하지 않았다면 우리 곁에 온 윤동주 시집의 제목은 ‘병원’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전시집의 대표 시로 선정하려고 했던 시 ‘병원’에도 병든 조국에 대한 애절함이 담겨있다. 더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애통함도 느낄 수 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病(병)을 모른다.
나한테 病(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試鍊(시련), 이 지나친 疲勞(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윤동주 ‘병원’ (1920.20) 中-

윤동주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시인 윤동주는 어떤 사연으로 교토에서 체포되어 후쿠오카까지 오게 된 것일까? 윤동주가 체포된 곳에서 45km 내에 오사카성 위수형무소가 존재했다. 오사카 위수형무소는 윤봉길 의사와 반전시인 쓰루아키라가 수감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윤동주는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1944년 4월 1일 형이 확정되자마자, 260km 가까이 떨어진 후쿠오카 형무소로 보내진다. 절친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도 4월 17일에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된다. 교정협회(矯正協会1966)에서 출간한 『時行刑実(전시행형실록)』에 의하면, 1941년 5월 15일부터 1945년 5월 말일까지 ‘조선독립운동 관계자’는 구마모토와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후쿠오사 형무소에는 윤동주와 송몽규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음을 짐작할 수있다.

그런데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된 윤동주와 송몽규의 죽음은 오랫동안 의구심을 야기시켜 왔다. 다음 편에서는 윤동주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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