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陽에 살았던 史람들이 만든 이야기-2

2. 생존을 위한 더불어 살기

기온과 해수면이 상승, 광양만이 생겨나다
1만여 년 전, 빙하가 물러가고 광양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빙하가 녹아 바닷물 수위가 높아지면서 어느새 백운산 자락에까지 짠물이 차올라 광양만이 형성되고, 그 한가운데에는 고양이를 닮은 묘도와 그 앞에 쥐를 닮은 서도 등의 여러 섬이 생겨났다.

산과 들판에 온대 식물이 자라 숲이 우거지면서 빙하기에 살았던 큰 동물들은 북쪽으로 올라가고 대신 노루, 토끼 같은 작고 민첩한 동물들이 등장하였다. 강과 바다에는 다양한 물고기와 조개류가 서식하기 시작하였다.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광양과 그 주변은 오늘날과 같은 지형과 자연환경을 지니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변화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광양에 살던 사람들은 그동안 수십만 년 동안 그냥 깨뜨려 사용하던 뗀석기를 갈고 다듬어 ‘간석기’라는 세련된 석기를 만들어 내었다.

또한, 늘어난 식량을 운반하고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토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토기의 발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술혁신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토기의 발명을 이전의 구석기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석기 시대, 즉 신석기 시대의 출발로 본다. 역사는 어제 같은 오늘이 아닌,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오늘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개더미는 신석기시대의 보물 창고이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삶은 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은 식량의 보고였다. 광양만과 섬진강의 조개와 물고기들은 아무리 잡아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 시절 광양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행복한 풍요로움의 흔적을 수천 년 후의 후손들에게 조개껍질 쓰레기더미로 전해주었다. 이를 조개더미 또는 패총이라 부른다.

▲ 돈탁마을
우리나라에서는 부산 영도구 동삼동 조개더미가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가장 유명하다. 광양에서도 진월면의 진정리 중산마을과 오사리 돈탁마을에서 조개더미가 발견되었다.

중산마을의 조개더미는 수어천이 광양만으로 흘러들어 가는 입구에 있으며, 남해고속도로 확장공사를 하던 도중 단면이 발견되었으나 아직 발굴은 되지 않았다. 돈탁마을의 조개더미는 섬진강 변의 언덕에 있다. 2011년 1월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으며, 이때 많은 토기 편ㆍ간석기ㆍ동물 뼈 등이 출토되었다.

▲ 돈탁마을 발굴 광경
어떻게 조개더미는 역사의 무덤이라는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많은 유물을 후세에 전해줄 수 있을까? 조개더미에서는 조개껍질의 풍부한 칼슘성분에 의해 보통 다른 유적에서는 썩어버리는 동물 뼈, 탄화된 식물 유체 같은 유기질이 잘 남게 된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의 조개더미는 그 시대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타임캡슐이다.

농경을 시작하고 토기를 만들다
광양의 신석기인 들은 우연한 기회에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년 가을 들판에서 수확한 조 낟알을 실수로 쏟아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같은 조 새싹이 자라나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제 봄이 되면 의도적으로 씨앗을 뿌리고 성장을 기다렸다가 가을에 수확하였다. 식량 채집에서 생산으로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혁명, 바로 ‘신석기 혁명’이다.

▲ 돈탁마을 발굴 광경
또 운 좋게 생포한 멧돼지 새끼 암수 한 쌍에게 먹다 남은 음식을 주면서 길렀더니 선물로 새끼를 낳아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거친 맹수인 야생 멧돼지는 서서히 집돼지로 변하게 되었다. 우연히 시작된 농경과 목축으로 광양의 신석기인 들은 이제 더는 떠돌이 생활이 아닌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농경은 한꺼번에 많은 양을 수확하여 저장할 수 있는 토기를 발명하게 하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트레이드마크인 빗살무늬 토기는 농경의 산물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강도를 높이기 위해 토기 표면에 빗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토기로, 한반도 전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광양의 진정리 중산마을과 오사리 돈탁마을 신석기 유적에서도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 돈탁마을 조개더미 토층
신석기 시대에 인간은 드디어 동굴에서 탈출하여 움집이라는 반지하식 집도 마련하였다. 움집은 50~100cm 정도 움을 파고 한가운데에는 난방도 하고 음식 조리도 하는 화덕을 두었다. 집 주변에는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구덩이를 따로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광양의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움집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함께 일하며 함께 나누다
현재 지구의 인구는 60억 명을 넘어섰다. 서기전 8천년 무렵의 신석기 시대 인구는 대략 40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순 비교에 무리가 있지만, 현재 광양의 인구가 15만 정도이니 신석기 시대에 광양에 살았던 인구는 약 100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물론 정확한 수치도 완전히 틀린 수치도 아닌 말 그대로 추정치일 뿐이다.

아무튼, 신석기시대 광양 인구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을 것이다. 이유는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였다지만 아직은 소규모였다. 농경과 목축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행해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농경과 목축을 통해 얻은 식량은 전체 생계경제에서 매우 적은 비중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 중산리 빗살토기
여전히 식량 대부분은 구석기 시대처럼 채집ㆍ사냥ㆍ어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신석기 시대의 식량 생산력이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은 거칠고 불친절한 자연을 이겨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며 살 수밖에 없었다. 도덕이 아닌 생존 차원의 더불어 살기였다. 이를 ‘원시 공동체 사회’라 부른다. 신석기시대의 공동체는 혈연으로 맺어진 마을 단위의 씨족사회였다. 마을의 모든 문제는 마을의 어른인 촌장의 주재 하에 마을회의를 통해 결정하였다. 적은 생산물이지만 공평하게 나누고, 어려운 상황은 모두가 힘을 합쳐 해결하는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한 공동체 사회였다.


중석기시대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단계를 중석기 시대로 부르고 있다. 이 시기는 기후가 따뜻해져서 토끼, 여우, 새 등 작은 짐승들이 번성하였고, 이를 잡기 위해 잔석기를 이용한 이음도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광양에서는 중석기 시대로 설정할 수 있는 유적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진월면 오사리 돈탁마을 조개더미 토층
조개더미는 조개 속살을 발라 먹고 버린 껍데기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일종의 쓰레기장이다. 오랫동안 사용한 조개더미는 층이 나누어져 있다.
아래층으로 갈수록 오래 된 것이어서 토기, 석기, 동물뼈 등의 시기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신석기 혁명
신석기 시대에 사람들은 농업을 시작하였는데, 이전까지 식량을 수렵 및 채집에 의존하던 방식에 비해 생산력이 엄청나게 높아져 인류의 삶 전체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를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혁명이라 한다.

진월면 진정리 중산마을 출토 빗살무늬토기 조각 이 토기를 사용한 신석기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확실히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는 시베리아 기원설이 가장 유력하다. 우리의 신석기문화와 가장 유사한 계통이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이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의 대표 유물인 빗살무늬토기 명칭 자체가 북방 유라시아의 ‘캄케라믹(kammkeramic)’을 직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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