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후쿠오카편②] -시인 윤동주의 죽음과 규슈제국대학 생체해부 사건-

▲ 김보예 쓰쿠바대학교 교육학 박사과정수료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의 생체해부 사건

교토에서 체포된 윤동주가 어떻게 후쿠오카까지 오게 된 것일까?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이 사상범으로 수용된 곳이었다. 1944년 11월, 첫 연합군(미국과 영국)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17년 8월 12일에 반영된 NHK 스페셜 <본토 공습 전기록>에 의하면, 미군이 일본을 공습한 횟수는 2000회가 넘으며 피해자는 약 46만 명에 이른다고 했다.

전쟁이랑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다량의 출혈로 죽은 환자들이 다수 나오기 시작했다. 환자치료를 위해서는 혈액을 대체할 용액이 절실하였다. 규슈제국대학(이하, 규슈제대) 병원은 본토 공습에 의한 부상자가 넘쳐났다. 구마노 이소(熊野以素,2015)의 <九州大学生体解剖事件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에 의하면, 규슈제대의 의학부 이시야마(石山) 교수는 하카타만의 해수를 사용한 대체혈액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이시야마 교수는 대체혈액을 주입하고, 혈압을 높여, 수혈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자 했다.

대체혈액의 실용화는 시급했고, 동물실험을 할 여유도 대상도 부족했다. 당시 만주 하얼빈에 본부를 두고 있는 731부대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의학박사 출신 하시다 구니히코(橋田邦彦) 문부대신(우리나라 교육부장관에 해당함)이 규슈제대 의학부에 미군 포로(사형수)를 의학연구재료로 사용해도 좋다고 훈시했다는 소문도 나돌기 시작했다.

시인 윤동주의 죽음과 생체실험에 대한 증언과 정황

현재 미군포로에 대한 생체실험은 일본 정부에서도 인정한 상태다. 하지만 윤동주와 송몽규와 같이 사상범으로 잡혀, 일본 전국에서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생체실험은 공식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과거 일본 국내 여론은 생체실험의 대상은 미군포로로 한정했으며, 윤동주의 사인이 생체실험임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2010년부터 이후부터는 생체실험의 재료로 사상범(조선독립운동가)들도 이용되었을 것으로 여론에 변화가 일어났다. 2019년 2월 10일에 NHK에서 반영된 윤동주 다큐멘터리 <詩人・尹東柱を読み継ぐ人々(시인·윤동주를 읽어 내려가는 사람들)>에서도 윤동주의 사인을 생체실험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생체실험 여부에 대해
서는 공식 문서로 증명되지 않은 상태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을 당했을 거라는 즉, ‘형무소에서 맞게 한 주사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은 다음의증언과 정황으로 유추할 수 있다.

▲ Naver 영화 <동주> 포스터_해수용액으로 추측되는 주사 를 맞으러 가는 윤동주

하나, 윤동주의 사인은 동맥경화증의「 뇌일혈」

송우혜(1998)의 <윤동주 평전>에 의하면, 후쿠오카 형무소의 수감자와 가족 간의 통신은 매달 엽서 1장씩만, 그것도 일본어로 쓴 것만 허락됐다. 늦어도 매달 5일까지 오던 엽서가 2월은 중순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고 한다. 2월 중순이 지나서야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라는 통지가 왔다. 윤동주의 아버지는 그 길로 후쿠오카 형무소로 떠났다. 윤동주의 아버지가 떠난 후, 후쿠오카 형무소로부터 한 장의 통지서가 추가로 도착했다. 「동주 위독.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 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제국대학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을 바란다」라는 위독 통지가 사망 통지보다 늦게 도착한 것이다. 위독 통지에
적힌 윤동주의 병명은 「뇌일혈」(고혈압, 동맥경화증으로 인해 뇌동맥이 터져서 뇌 속에 출혈하는 병증)이었다.

둘, 생체실험으로 동맥에 해수용액을 주입했던 규슈제국제학

구마노(2015)에 의하면, 1944년 5월 27일. 후쿠오카 외과학회에서는 「대용혈액」을 테마로 발표가 진행됐다. 미국포로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진행하던 이시야마 교수는 “대체혈액으로는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바닷물을 희석해 멸균해 만든 용액이 적합하다”라고 했다. 이이서 이시야마 교수의 생체실험에 참여한 고모리(小森) 강사가 “희석하지 않은 해수용액을 동맥에 주사하면 진통을 가라앉히는데 효과적이다”라고 발표했다.

셋, 이름 모를 주사 주입 후 현저히 떨어진 뇌 활동

송우혜(1998)에 적힌 독립유공자 김헌술씨의 진술에 의하면, 옥의(獄醫, 교도소 의사)가 암산 용지를 2~3장씩 나누어 주면서 일정 시간 내에 암산해서 연필로 답을 적으라고 했다고 한다. 암산 용지에는 간단한 가감산 문제가 수백 개가량 있었다. 일정시간이 지나자 의사는 답안지를 거두었고, 주사기를 꺼내 5cc~10cc 정도의 주사액을 주입했다.

그때 규슈제대 의전생이었던 조희달이 “나도 의학을 배우다 왔는데, 무슨 용액이냐?”라고 물었으나, 일본인 의사는 별일 아니라면서 답변을 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름 모를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지 며칠이 지나자 암산 능력이 거의 반으로 떨어졌으며, 1주일이 지나면서부터는 암산 능력이 더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오답도 많아졌다. 당시 수감자들은 암산시험지를 생체시험(生體試驗)이라 불렀다고 한다.

▲ Naver 영화 <동주> 스틸컷__의사가 나누어 준 암산시험 지를 풀고 있는 동주

넷, 규슈제대국대학 의학부에 시약한 방부제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윤동주의 당숙이 동행했다. 윤동주의 아버지와 당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송몽규를 면회했다. 그날의 면회가 송몽규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지인과 면회였다. 송몽규의 몰골은 꼭 뼈에 가죽만 씌워 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왜 그 모양이냐?”는 질문에 송몽규는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고 하였다.

송몽규와의 면회를 마치고, 시체 안치실로 가니 직원이 “마침 잘 왔다. 오래 기다려도 유족이 오지 않아서 유해를 규슈제국대학에 옮겨가려고 했는데, 휘발유 사정으로 차가 오질 못해서 그냥 있던 참이다”고 했다고 한다.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시체에다 방부제를 시약해서인지 윤동주의 모습은 평상시 그대로였다. 그리고 면회가 있은 지 9일만인 3월7일에 송몽규는 절명했다. 눈을 번득 뜬 채 죽은 송몽규 역시 규슈제국대학에서 해부용으로 쓸 수 있도록 방부제를 시약해 놓은 상태였다.

윤동주의 죽음에 관한 진상규명이 역사의 빛이 되길

윤동주의 병명 고혈압, 동맥경화증인 ‘뇌일혈’인 것. 해수용액을 동맥에 주입하여 혈압을 높혀 수혈한 시간을 벌고자 한 것. 주사액 주입 후 뇌 활동에 손상이 온 것. 규슈제대에서 해부용으로 시신을 희망한 것.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당시 규슈제대에서 연구하고 있던 해수를 주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이 사실은 강한 의심과 추측에 지날 뿐이다.

문학가 아타카 나쓰오(安宅夏夫) 씨는 윤동주를 포함하여 반전 시인 쓰루 아키라도 생체실험으로 숨을 거두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쓰루 아키라는 이질(赤痢, 혈액 또는 농이 섞인 빈번한 설사)에 걸려 수감자 신분으로 도쿄도립 도요타마 병원(東京都立豊多摩病院)에 입원했으나, 1938년 9월 14일에 병사했다. 아타카 씨는 사상범들에게 이질균을 일부러 감염시켰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지금이라도 치안유지법으로 사라진 문학가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쓰여진다고 하였는가! 약자에 대한 가혹행위는 진실을 은폐하고 고개를 숙여야 할 강자에게 저지른 죄만 인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윤동주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이 독립운동가 전체, 더 나아가 일본 국내의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아픔까지 해명해 줄 수 있는 한 줄기의 빛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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