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의 야산부터 백운산 정상까지 넘나든 파란만장한 하루

컴퓨터 모니터와 기나긴 씨름을 하고 퇴근을 코앞에 둔 시간. 피곤한 몸과 홀가분함이 공존하는 ‘퇴근’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즐거움은 직장인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눈발이 휘날려서 핑곗거리도 좋았다. 그래도 신참이 칼퇴를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퇴근 준비 모드로 전환 중이었다.

그런데 먼저 퇴근하던 대표님이 별다른 설명 없이 “윤기자는 등산복 있나요?”라며 가볍게 말을 건냈다. 나 또한 경쾌한 목소리로 긍정의 대답을 했다. 그러자 미소를 띄며 “내일 따뜻하게입고 오세요. 백운산에 눈 찍으러 갑시다”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대표님이 웃으면서 내 머리를 쥐어박은 기분이었다.

‘멘붕’ 말고는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에게 등산복이란 고기능성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일상복 용도로만 쓰였고, 올라가면 내려올 것을 왜 가는가에 의문을 품고 산 세월만큼산은 가까이하기엔 힘든 존재였다. 등산도 엄두가 안 나는데 설산(雪山)의 여정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무엇이든 부딪히고 배워야 하는 수습기자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밤새 걱정의 바다에서 잠수와 다이빙을 무한 반복했다.

다음 날 아침, 히말라야원정대 틈에 휩쓸려가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복장을 갖춰 입었다. 혹시 눈이 더 올까 걱정을 했는데 눈은 그치고 볕은 따사로웠다.

봄을 재촉하는 복수초를 마주하다

사무실을 나선 차는 백운산이 아닌 진상면으로 향했다. 외관상 성능에 그다지 신뢰가가지 않는 대표님의 승용차는 울퉁불퉁 가파른 비포장도로를 꾸역꾸역 올라갔다. 차가 뒤로 고꾸라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식은땀이 바싹 나는데 드디어 산중에 둘을 덩그러니 놓아두고 시동이 멈췄다.

대표님과 나는 어깨에 카메라 하나씩 둘러 메고 나뭇가지와 눈을 헤치며 산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뭐가 있다고 길도 아닌 곳을 자꾸들어가나 싶었지만, 잠깐 방심하면 중구난방으로 자란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힐 수 있어 신경이 곤두섰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 올라가는데 갑자기 “발 아래 조심하세요!”라며 대표님 손이 땅을 가리켰다. 손 끝으로 시선을 내리니 삭막하기 짝이 없는 산중에 노란 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지난주 1면에 실린 ‘복수초’였다.

▲ 바위를 병풍 삼아 해사한 얼굴을 내민 복수초

대표님은 광양에 얼마 남지 않은 복수초 군락을 찾아온 것이었고,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복수초 꽃봉오리는 얼핏 보면 나뭇가지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아 걸음을 조심히 옮기라는 뜻이었다.

한발 한발 살얼음 딛듯 각도를 바꿔가며 복수초를 찍었다. 녹록찮은 환경에서 언 땅을 뚫고 나온 복수초를 가까이 보고 있자니, 지금 내 눈으로 느끼는 생명의 찬란함을 사진에 똑같이 담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신중한 마음으로 연신 셔터를 눌렀다.

대표님은 눈 쌓인 복수초를 찍고 싶었는데 군락지의 눈은 이미 녹았고, 복수초는 다음 주쯤 만개하겠다며 아쉬워했다. “다음 주에 다시 옵시다”라는 짧은 한마디에 대표님의 애마를 타고 경사진 산비탈을 다시 오르는 심장 쫄깃한 경험이 자동예약 됐다.

카메라 둘러메고 백운산의 품으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차에 오르자 옥룡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느낌상 드디어 백운산으로 가는구나 싶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백운산은 따뜻한 낮 기온으로 벌써 산허리까지 눈이 녹고있어 눈꽃을 찍으려면 영락없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야 할 상황이었다. 백운산 정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의미 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상백운암으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는 돌과 흙 그리고 공사 장비들이 뒤엉켜서 길을 만들기 위한 작업 중이었다. 어지럽혀진 길을 아슬아슬 올라가니 막다른 길이 나왔다. 카메라를 어깨에메고, 등산스틱 하나에 몸을 의지 한 채 백운산의 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공사가 제법 깊은 곳까지 진행돼 대표님이 예상한 등산로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마음은 급했다. 우리는 정해진 등산로를 살짝 비켜난 산길을 택했다.

길이 아닌 길로 가다 보니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져 한 발 내딛기조차 힘들었다. 볕이 드는 쪽은 눈과 흙, 낙엽이 곤죽이 되어 신발에 떡처럼 들러붙어 중간중간 발을 털고 가기도 했다.

나뭇가지를 붙들고 흔들리는 몸의 균형을 잡고, 굴러떨어질까 봐 내딛는 발자국들은 신중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생기는 몸의 긴장과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박동으로 온몸은 땀이 비 오듯 했고, 패딩 안의 옷들은 축축이 젖었다.

눈이 녹기 전에 빨리 정상에 도착하자며 앞만 보고 가시는 대표님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이러다 백운산 꼭대기에서 대표님 멱살을 잡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백운산 설경

눈길에 넘어질까 봐 발걸음에 촉각을 세우며 올라가는데 갑자기 대표님이 고개 좀 들어보라고 하셨다. 무심코 고개를 드는데 나도 모르게 “우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 인생 그렇게 아름다운 눈을 본 건 처음이었다고 단언한다.

어디서든 볼 수 있었던 눈이 아무나 볼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천정으로 옮겨놓은 듯 선명한 하늘은 순백의 세상과 대비를 이루며 서로를 빛내주고 있었다.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어느 각도로 찍어도 달력에서 봄직한 작품사진이 되었다. 문득 자연은 쉽게 내어주지 않지만, 마주하고자 다가오는 이에게 노력그 이상의 감동을 주는구나 싶었다.

▲ 백운산에서 설경(雪景)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수습기자

산에 머무르는 해는 빛을 빨리 거두기에 우리는 서둘렀다. 내려오는 길은 정상적인(?) 등산로였다. 먼저 다녀간 이들의 발자국을 밟아가며 차분히 내려오니 웅장한 자연의 품 안에 작은 암자가 보였다.

대표님은 한눈에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는 상백운암의 역사와 광양과의 연계성을 설명해 주셨다. 황제바위와 돌탑, 백운사를 두루 둘러보며 곳곳에 광양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산행을 마무리할 때쯤, 대표님은 “지역에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을 독자들에게 더 많이 전달하기 위해서는 수고스럽더라도 발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기자가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하루하루 느낀다. 그러나 나는 대표님의 주문처럼 내 몫의 일을 우직하게 해나가는 부지런한 기자가 되리라 다짐했다. “대표님! 백운산 다음은 길호바다 인가요?” 아재개그를 던지고 바라본 백운산 뒤로 해가 저물었다.

▲ 백운산의 정기를 품고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상백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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