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모처럼 도서관에 갔다가 행복한 책읽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이 행복을 깨트리는 전화 한 통화. 할 수없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잠깐 밖으로 나갔다 들어 왔더니 웬 여자 분이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맞은 편에 앉아서 시선을 끌던 분이다.

커다란 가방에서 주섬주섬 먹을거리를 꺼내더니 먹고 마시고 씹고 삼키는 일을 줄기차게 하면서 계속 소음을 만들던 그 분!

그 뿐인가, 고뿔이 드셨는지 코를 팽팽 풀어서 책상 앞에 휴지로 수북한 꽃다발을 만드는 신기능까지 선보이셨지.

아 또하나, 무슨 연유에선지 두꺼운 영어 원서를 읽진 않고 신경질적으로 확확 넘겨대며 궁시렁궁시렁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시기도 해서 참 여러가지 하시는구나 감탄했었다.

신경세포들이 삐죽삐죽 날카로워 지려는 걸 애써무시하며 이내 책읽기에 빠져 들었었다.

살짝 맛이 간 분이려니 했다.
그런데 말을 걸어오다니! 내가 책잡힐이라도 했나? 약간 경계하면서 왜 그러시죠? 했더니 뜻밖에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저자와 출판사를알고 싶다 한다.

하, 이런 반전이! 역시 선입견은 몸에 나쁜 것이여.
속내를 들킨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책 좋아하시는 군요.

화들짝 반겼다. 펼쳐놓고 나갔던 책이 덮혀 있어 기분이 좀 찜찜했지만 설마 이 양반 짓이겠어? 넘어가고 기분좋게 책을 건넸다. 그런데 이 아줌마가 코맹맹이 소리로 우아하게 그러신다.

"얼마나 지독한 사랑이길래 제목을 이렇게 찡하게 달았을 까요. 난 책 제목에 완전꽂혀 버렸다우" ???????
내가 읽고 있던 책은 한겨레 논설주간이었던 김선주님이 쓴 시사 칼럼이었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하하. 제목이 오해를 불러일으켰구나.

"그러시다면 이 책은 원하시는 게 아니다. 이 책은 일선의 기자가 바라본 세상이야기, 시사칼럼이다" 다며 책을 슬그머니 당겼다.

그랬더니 급실망하신 눈치가 역력한 이 아줌마 갑자기 쇳소리를 내며 허기가 지는지 말꼬리를 잘라 먹기 시작했다.

"엉? 시사칼럼? 에이, 재미없어. 그 딴 걸 왜 읽나? 난 달달한 연애소설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늙을수록 왜 찐한 로맨스가 땡기나 몰라~" "아…네……."

잘 됐다 싶어 이번엔 확실하게 책을 챙기는데 이 아줌마 돌아서다 말고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지 아님 내가 보여주기 싫어서 구라라도 푸는 줄 아는지 서평이라도 보여달라 한다.

그러시라고 얼마든지 그러시라고 했더니 내 옆에 앉아서 뒷면의 서평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시거나 말거나 이미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어서 깡그리 무시하고 컴퓨터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내 반응을 끌어내려고 수작을 부리시는 건지 진심으로 그러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출중했던 혼
잣말 실력을 어김없이 다시 뽐내시는 아줌마.

"정의의 부합? 통찰력 단계? 이건 또 뭐냐? 정신적 오르가즘? 의식의 변화? 푸하, 작작 웃기고들 계시네!"

아무리 찔러대도 내가 꿈쩍않자 책을 툭 던져주며 기어코 명언을 남기신다. "제목에도 예의가 있어야지.
안 그래? 시사 얘기에 제목을 이딴 식으로다는 건 독자들 유혹하겠다는 꼼수아냐? 하마트면 낚일뻔 했잖아. 쯧쯧 !!!"

아니 여보세요. 아줌마! 뭐 어쩌라구요오~. 내가 뭐, 이 출판사 대표기를 합니까, 이책을 쓴 작가길 합니까?

죄가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분의 책읽기 밖에 더 있냐구요?

이렇게 박박 따지고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어디 한 마디만 해봐라 딱 시비를 기다리시는 눈치셔서 꿀꺽 참고 말았다.

맛이 간 사람하고 섞였다 내 맛까지 갈까 싶어서… 따지고 보면 이 아줌마가 책 제목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건 내 허락없이 내 물건을 손댔다는 얘기고 게다가 남의 귀한 시간 그 잘난 로맨틱한 호기심으로 망쳐놨으니 내가 화를 낸다 해도 그 아줌마의 완전한 케이오 패 일텐데도 헉 말문이 막혔다.

하도 당당하고 우아하게 무례를 저질러서 순간 나도 판단이 흐려졌던 것일까? 멍때리고 있자니 그 아줌마, 그딴(?) 책이나 읽고 있는 날 한심한듯 째려보고 돌아 서신다.

뭐,그래 늙어가면서 남의 사랑 이야기 궁금할 수 있지요. 시들시들한 세상, 입맛 확 땡기는 남의 이별 얘기 엿보고 싶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주머니! 대한민국 아줌마 대표로 하는 말이니 고깝게 듣지 마시고 새겨 들어주세요.

이별에도 예의가 있듯 호기심에도 예의가 필요 하구요. 늙어갈수록 궁금해야 하는 건 남들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인간에 대한염치(예의)라구욧!

정작 그땐 아무 생각 안 나다가 꼭 지나고 나면 이렇게 할 말이 줄줄 떠올라 뒤늦게서야 난 전의를 불태우곤 한다.

그때 이 말을 꼭 했어야 하는데 그럼 폼나는건데 이러면서 뒷북이나 치는 것이다. 이거 대한민국 대표 아줌마가 그럼 안 되는거잖아!.

·미주 한인 신문 기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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