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서 광양여고 2학년

▲ 김민서 광양여고 2학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들로 좌절하고 절망할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파생된 감정들은 슬픔과 우울로 이어져 결국 다른 일에는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한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나는 좌절감을 맛본다. 다른 사람들은 확고한 목표가 있어 조금씩 그 길을 내딛는 모습이 보이지만 원하는 것과 잘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난 늘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절망한다. 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하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공통적으로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고개 숙여 깊은 슬픔에 부딪히게 된다.

조선시대 고전소설인 ‘운영전’속, 안평대군에게 속해 있는 궁녀들도 개체로서 행동하거나 자립해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기에 허수아비처럼 껍데기인 자신의 모습에 심한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책 속에서 안평대군은 영리해 보이는 궁녀 10명을 뽑아 학문을 가르치고 시를 짓게 하며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을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인형의 집에서 로라가 느꼈던 것처럼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받거나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안평대군에게 속한 줄 달린 인형 같은 존재였다.

운영이 김진사와 사랑에 빠지지만 궁녀의 신분으로 궁 밖 사람과 인연을 이어갈 수 없으며 위태했던 그들의 애정 행각은 비극을 맞게 된다. 당시 조선시대 궁녀들은 다수가 천한 노비 출신으로 소속된 궁의 가사를 담당하며 관련된 교육을 받아 상전을 모셨다. 더욱이 왕의 여인인 궁녀는 주군의 애정 대상이었으며 노리개로 궁녀라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일이었다. 운영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절망했지만 처연한 아픔으로 자결까지 한 까닭은 당시 자신을 가두었던 제도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다. 시대의 모순에 극렬하게 맞서 죽음을 선택했다.

‘운영전’의 운영과는 달리 조선시대 규방가사인 ‘덴동어미 화전가’에서 덴동어미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고 또 다른 이와 이별도 하지만 거듭 개가를 하며 적극적인 사랑을 한다. 인생에서 사랑이 한 번뿐일 필요가 없음을 몸소 보여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겪은 우여곡절 많은 자신의 기구한 일생을 청춘과부에게 들려줄 때는 그녀의 개가를 말리기도 한다. 만약에 운영이 덴동어미를 만났다면 사랑과 인생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신분에 따른 제약보다 너무나 견고한 사회적 제도로 인한 상실감을 더 크게 느꼈기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끊으며 계란이지만 바위 치기를 했다.

독일의 심리학자 겔렌과 사회학자 아도르노는 제도에 관한 논쟁에 있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겔렌은 제도가 개인이 처하게 될 많은 어려움과 위험에 대한 행동양식으로 일시적인 것이 아닌 제도화가 되어 계승되고 보호 장치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도르노는 제도가 기본적으로 그 제도에서 벗어난 행위 양식에 대해서는 파괴적인 조치 위에서 성립할 수 있고, 폭력적으로 제한하는 특징으로 인해 보호와는 상반된 성질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운영전에서의 제도는 궁녀들의 삶의 자유, 특히 사랑을 제한함으로써 그것을 어길 시 엄벌에 처하는 파괴적인 성격을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도 제도화된 여러 사안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좌절하며 절망감을 느낀다. 단순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서가 아닌 모두를 아우를 수 없는 다양한 제도로 인해 핍박 받으며 존중받지 못해 힘들어 하며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지나고 보면 모순인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번연한 현실의 잘잘못도 가려내지 않으며 탄력 있는 고무줄처럼 불분명한 기준이 판가름의 가치로 적용되어 여전히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다.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못한 것들 사이에서 한층 더 불완전한 삶 속에 처해진 이들을 제도화된 틀 속에 가두고선 엉터리 잣대로 그들을 고문하지 않아야 한다. 아주 아주 오래전의 운영이 지금도 존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절망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더는 죽음으로 저항할 일이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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