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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철 기자의 詩가 있는 월요일.7
최인철  |  hwakae72@gyci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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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14  16: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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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시인 정희성
- 1954년 경남 창원
-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변신’
-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 김수영 문학상 외 다수
- 시집 <저문 강의 삽을 씻고> 외 다수

노동을 이토록 서정적으로 차려내는 시가 있다. 30여년 전 내가 아직 푸르렀을 때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찬찬히 읽으면서 가 슴을 채우던 생각이다. 어떤 선배는 문학을 공부하는 못난 후배에 게 언제나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은 느낌을 주곤 했는데 정희성이 꼭 그랬다.

여전히 푸르렀던 우리는 남은 강의조차 팽개치고 학교 앞 판넬로 지어진, 지붕 낮은 식당 겸 주막집에 서둘러 기어 들어갔다. 해가 서산 품에 깃들기 한참 전이었다. 파전이나 김치찌개 등등을 팔았 던 그곳에서 우리는 그를 안주 삼아 씹고 조리를 돌렸지만 사실 우 리와 같은 나이, 역시 청춘이었던 그가 쓴 시를 질투했다. 아니, 그 의 문재文才를 시기했다.

그리고 술이 돌고 돌아 급격히 말이 없어진 우리에게 깃든 것은 절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몇몇은 그렇게 절망을 토악질해대며 시인의 길을 걸었고 전공과는 달리 소설을 쓰는 친구도 있으나 대 부분은 시와는 먼 길을 가고 있는 요즘이다.

다시 저문 강으로 돌아가자. 70대 초반 태어난 내가 들과 산을 뛰며 놀 때 쯤인 1978년 나이 스물을 갓 넘긴 정희성은 시‘ 저문 강 에 삽을 씻고’를 썼다. 1973년 동아일보를 통해 시단에 이름을 올린 정희성의 첫 시집 제목이기도 한 ‘저문 강의 삽을 씻고’를 청년이 돼 몇 번씩 곱씹어 읽었다. 그의 시에서 진한 청국장 냄새가 났다.

시 ‘저문 강에서 삽을 씻고’를 읽으며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삽이 다. 삽은 인류의 노동을 상징한다. 그리고 삽을 씻는다는 것은 하루 의 노동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시 속에 모습을 드러낸 일당쟁이 막 노동꾼은 그렇게 저문 강에 삽을 씻으며 하루 치 슬픔까지 퍼다 버 린다. 부당하고 억울한 것들도 마저 버린다. 부당하거나 억울함에 대항해 저항하기에는 그는 힘이 없다. 그래서 묵은 슬픔이 자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버림을 선택한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태운다. 고단한 하루를 살아낸 자신에게 허락하는 작은 위안이다. 이 뿐 아니다. 돌아가기 전 담배 한 개비는 가족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분노를 버리고서야 웃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삽은 강물에 씻고 분노는 담배에 날려 보낸 것이다.

다만 삽 한 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어서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 위에 달이 뜨는 날을 기다리게 되는 심정은 어쩔 수 없다. 유일한 평화는 잠일 수밖에 없는 생도 있는 법이니까.

삽 한 자루를 다 씻고 슬픔과 분노도 퍼다 버린 일당쟁이 막노동 꾼은 삽자루를 잡는 손에 다시금 힘을 준다. 먹을 것 없는 사람들 의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까닭이다. 그곳에 그가 살아가야 하 는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하나 다시 밝 아져 돌아가야 하는 곳 역시 먹을 것은 없으나 그곳에 자신을 기다 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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